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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uyang Xiu.jpg

구양수

구양수(歐陽修, 1007년~1072년)는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 이자 문인, 학자이다. 자는 영숙, 취옹. 육일거사. 익호는 문충.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생애[]

길주 여릉(현재의 장쑤 성 길안 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4살 때 부친을 여윈다. 부친인 구양관(歐陽觀)은 쓰촨 성 지방관이었는데, 그의 사후 어머니를 따라 후베이(湖北)로 가서 살게 된다.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정규교육에 의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1030년(천성 8년) 서른 살때 진사에게 급제하여 포증을 이어 개봉 부윤의 임무에 종사한다. 고관으로 출세의 길이 열려있었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가꾸진 독립 사상은 그의 성품 중의 하나로 계속해서 남게 되었다. 이후 관각 비교 연구 등을 역임하지만, 1036년 (경우 3년) 개혁파 범중엄을 월권을 하면서까지 변호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당시 재상이었던 여의간에 의해 이능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에 복귀 간관에 임명된다. 범중엄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의 신임를 잃게 되고, 1045년 (경력 5년)에는 비방을 받아 안후이 성의 지사로 또 한번 좌천되었다.

몇 해 후에 다시 한번 중앙에 복귀하여 한림학사 등 요직을 역임한다. 1057년 (가후 2년)권 지례 부공거에 오르고, 과거 시험을 감독하여 소식을 발굴해 낸다.

그 후 추밀부사, 삼지정사(부재상)에 오르고, 소순, 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전부터 지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에 대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의 한 사람이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다음해인 1072년 (희녕 5년), 은둔 생활을 하며 영주(안후이 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대 문화에 끼친 영향[]

문학[]

산문[]

산문에 있어서는 한유의 예를 모방하고, 이른바 고문 부흥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취옹정기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운문[]

운문으로는 시(詩)와 사(詞)를 모두 쓰고, 은밀하고 유머러스한 작풍이다. 시는 당나라 후기의 현란한 문체를 피하고, 당나라 전성기의 실질적이고 강건한 위풍을 따랐다. 구양수는 사(詞)로도 유명한데, 특히 채상자(采桑子)를 위해 만들어진 서호호(西湖好)라고 지어진 일련의 사는 그 양식의 표준이 되어 사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역사[]

역사가로서 구양수는 지방 근무 중에 신오대사(新五代史)를 편찬하고, 중앙에 복귀하여 송기 등과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명한 경학자였던 류창(劉敞)과 작업을 같이 하여 범례를 찾게 만들어진 것으로, 춘추 학문적 색채가 강한 근엄한 스타일을 견지한 책으로서 평가됐다. 또 금석문의 수집을 좋아하여, 집고록(集古録)을 정리, 사료 편찬의 방법으로서 금석문의 활용을 확립하는 송대의 역사수법(특히 금석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

구양수의 일련의 작품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구양문충공전집(欧陽文忠公全集)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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