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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虎皮]는 호랑이의 털가죽이다. 사람은 태어나 이름을 남기고 호라이는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연나라 땅 사람의 말은 살찌고 활의 힘은 강해지기만 했네. 호라이 가죽 말라 안장 만들고 독수리 깃으로 화살 만들었다. 호랑이는 가죽때문에 죽고,인간은 이름때문에 죽는다. 호랑이는 가죽을 아끼고, 군자는 입을 아낀다.

검은여우(黑狐)는 수시로 가금들을 물어가 시골마을의 골칫거리였던 여우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서 사라진 붉은 여우를 다시 되살리려는 계획이 모처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조선 초기 환관으로 징발되어 명나라로 끌려간 윤봉(尹鳳) 은 북경황제의 신임을 얻어 수십년동안 궁중에 출입하여 벼슬이 태감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들어와서 예쁜 여자아이들과 여종들을 차출해 가는가 하면 많은 뇌물을 받아 사욕을 챙기는등 횡포가 몹시 심했다. 황제를 속여 해마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해청(海靑:해동청)·토표(土豹:시라소니)·흑호(黑狐:검은여우) 등을 잡는다고 성가시게 하였다.

세종 10년(1428년 )2월12일 각도의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명을 내려 "검은 여우[黑狐]를 산채로 잡아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쌀 50석을 상주고, 면포(緜布)로는 50필을 줄 것이며, 이를 보고 관(官)에 알려 잡게 한 사람은 쌀 30석을 상주고, 면포로는 30필을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쌀 한석은 2가마니/예전 한가마니는 80Kg이므로 50석은 1백가마니 ) 그러자 이듬해 3월 10일 평안도에서 검은여우를 포획하여 바치니 이를 상림원에서 기르라고 하였다. 상림원은 조선시대에 궁중 정원의 꽃과 과실나무를 관장하던 부서였다. 가을이 되어 명나라로 공물이 보내어지게 되었다. 이 중에는 검은여우(黑狐)와 흰기러기(白雁)도 있었는데 이것들은 윤봉이 요구한 것들이었다.

세종 13년에도 황해도 감사가 검정여우를 바쳐오니 승정원에 전지하여 “앞서 검정 여우를 생포하려던 것은 중국에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작년에 평안도에서 생포해 바친 것을 즉시 도로 놓아 주게 하였는데, 이제 황해도에서 또 바쳐 온 것은 모르고 한 짓이니, 이를 각도 감사에게 잘 타일러 가르치라 하였다.

지금의 서울 태평로 자리에는 중국사신들의 숙소인 태평관이 있었다. 인종1년(1545 년) 송세형이 사신들을 문안 하기위해 태평관으로 가던중 저자 상인들 백여명이 다가와서 울며 하소연 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곤궁이 극도에 이르렀는데 이제 4명의 중국 사신이 와서 무역하는 모든 것을 다 마련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으니 앞으로 어떻게 삶을 지탱하여 살아 가겠습니까?. 그다지 구하기 어렵지 않은 물건이라면 논밭과 집을 팔아서라도 구할 수 있겠으나 흑호피(黑狐皮:검은여우가죽)를 무역하는 일로 말하면 온갖 계책으로 꾀하여도 구할 길이 없으니, 지극히 괴로와 이렇게 쫓아와 간절히 호소합니다.’ 하니 그 말은 임금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임금이 측은히 여겨 “어찌 호피(狐皮)의 무역 때문에 저자 사람의 억울한 일이 있게 할 수 있겠는가. 궁궐에 있는 호피(狐皮)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그 청구하는 수량을 충당할수 있다면 곧 내어 주도록 하고, 그 수효에 모자라더라도 다른 물건으로 대신해 주는 것이 또한 무방할 것 같다." 고 하였다. 중국 사신들이 탐내는 검은여우는 매우 희귀 하였던것이다. 그리고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왕실에서는 어느정도 그가죽을 확보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평안도에서 2마리 황해도에서 1마리가 생포된 기록이 있는데 임금이 각 도에까지 현상을 걸고 산채로 잡아 올리라고 하교 한것으로 미루어 보면 중부 이북지방 뿐만 아니라 삼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에 걸쳐서 존재 하였던것 같다.

늑대 중에서도 간혹 검은 늑대가 나타난다. 이것은 검은개와 늑대가 교접하여 자손 늑대에게 전달된 검정색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늑대의 유전자 속에 정착 되었기 때문에 검은 늑대가 생겨나는 것인데, 여우도 늑대와 같은 경로를 통해서 검은 여우가 생겨나게 된것으로 짐작된다.(여우와 개의 교잡이 가능 하다면)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어왔던 검은여우는 붉은 여우중에서 간혹 나타나는 변종인지 아니면 중미의 회색여우와 비슷한 종자인지 알수있는 방법은 없다. 외국에서도 야생에서 검은여우가 발견 되는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중국인 들은 옛부터 우리나라에 상서로운 짐승들이 많이 살고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우리 나라에는 까치와 사슴, 여우, 기러기,꿩, 매, 호랑이 같은 동물중에서 하얀색을 띈것이 자주 발견 되었음은 여러 기록에서 흔히 볼수있다. 뿐만 아니라 검은 여우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 왔으며 중국인들은 이짐승들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도산가(塗山歌)에서 왕회(王會)는 청구에 검은 여우가 있는데 청구는 해동의 지명이다. 라고 주석을 달았다. 구미호에 관해서도 왕회(王會)는 이의 해석을 불령지(不令支)의 현모(玄模)를 해석한 주석을 인용했는데. 불령지는 동북 오랑캐의 땅으로 현모는 흑호(黑狐:검은여우)를 이르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일주서(逸周書)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백여우(白狐)편집

검은여우 외에도 흰여우가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멜라닌 색소가 결핍된 알비노 여우 였을 수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별나게 흰색 짐승들이 많이 났다. 지금도 각 지방의 사슴농장 같은 곳에서 흰사슴이 탄생하는 경우가 자주있어 이것이 뉴스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모두 색소 결핍증에 걸린 알비노 사슴이다. 무슨 이유때문인지 조선시대에는 소나 개, 말, 닭등의 가축에서도 기형의 동물이 매우 많이 출현하고 있다. 아무튼 이 백여우는 귀가 짧은 북극여우가 아니라는것 만은 확신한다. 백 여시(여우의 방언)한테 홀렸다 하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흰여우는 야생동물 이라기 보다는 귀신과 동물의 중간쯤에 자리한 요물로 여겨졌다. 사람을 홀리고 둔갑술을 펼치며 인간의 정기를 빼앗아가기도 한다고 구전되어 왔는데 검은색이 없는 알비노 여우의 날카롭고 타는듯한 붉은 눈과 핑크빛이 감도는 코는 슬쩍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런 생각이 들고도 남았을것이다.

북극 여우는 흰여우이다.

왕위에 오른지 9년째 접어든 1427 년 5월 세종대왕은 각도 감사에게 명나라에 보낼 흰 여우가죽(백호피/白狐皮)을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일 없이 잡아 올리라 하였다. 설령 백호피(白狐皮)를 구하지 못하였거든 억지로 구하지 말고 전날에 정했던 수량대로 값을 주어 널리 구할 것이며, 또 미리 각 고을에 통지하여 가을을 기다려 폐단 없이 잡아서 올리도록 하라.” 고 명하였으니, 대개는 이 흰여우 가죽들을 명나라에 보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교지의 내용으로 봐서 흰여우 역시 드물었지만 전국 어디에서나 잡을수는 있었던것 같다.

성종조에 왕가의 종친인 이승은이 간통죄를 저질렀는데 정괄등이 징계할것은 청하였다. 중도에 홍윤성이 아뢰기를 신이 경진년 에 신숙주(申叔舟)와 더불어 북정(北征)하였을 때에 야인(野人)이 백호피(白狐皮)와 초서피(貂鼠皮)를 신숙주에게 주고, 나무로 만든 석장(錫杖)을 신에게 주므로, 신 등은 생각하기를...." 하면서 백호피(白狐皮)에 대한 언급이 있다. 흰여우는 두만강 건너 여진 에서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옛 강역이었음은 물론이다. 16세기초 폭군 연산은 신하들에게 전교하기를 “흰 여우·검은 여우의 가죽, 흰 노루·흰 사슴의 가죽은 이미 각도에 명하여 봉진(封進)하도록 하였거니와, 새·짐승· 풀·나무 등 무릇 이상한 물건도 아울러 봉진하게 하라. 그리고 개나 말은 토성(土性)이 아니면 기르지 말게 하라. ‘먼 곳의 물건을 보배로이 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이 여오(旅獒)의 훈계지만, 만약 외국의 산물이나 먼 지방의 물건이 아니라면 얻는 대로 바치는 것이 신하의 직분에 당연한 일이니, 아울러 각도에 효유하라.”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의 기록에도 흰여우(白狐)가 언급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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