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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또는 풍신수길(豊臣秀吉,1536/37 일본 오와리 구니[尾張國] 나카무라[中村]~1598. 9. 18 후시미[伏見])는 중세 일본의 무장(武將)이다.

천년이 넘는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의 신사인 풍국신사(豊國神祀)와 함께 126,000여명의 조선병사와 일본군에게 학살된 조선백성의 귀와 코무덤인 일명 이총(耳塚, 비총(鼻塚)으로도 적혀있는데 코보다 귀가 덜 혐오스러워 이총이라 하지 않았나 여긴다.)이 주택가 한가운데 서 있다.

풍신수길은 임란에 참여한 왜군에게 처음에는 조선군의 목을 전공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가 나중엔 일본병사 1인당 3개 이상의 코를 베어오라는 명을 내렸다. 귀는사람당 두개이지만 코는 한개이니 부피도 작고 전공관리 또한 간단했으며, 소금에 절여 보낼 경우 상할 염려도 없는 것을 이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당시 왜군은 조선군사로는 전공을 채우지 못하자 많은 민간인을 죽여 코를 베어 보내 전공을 과장하곤 했다. 당시 살아있는 사람의 코와 귀를 베어가는 바람에 마을에 왜군이 나타나면 모든 사람이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고 죽은 사람이 아닌 산사람의 코와 귀를 베었으니(물론 반항하면 죽음이다!)당시의 참상이 눈에 선하다.

요즘도 어른들이 울거나 보채는 아이를 달랠 때 쓰는 "에비"라는 용어는 이비(耳鼻)가 변형된 말로 임란당시 코와 귀를 베어가는 왜군이 얼마나 무섭고 악랄했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임란의 주역인 풍신수길(豊臣秀吉, 토요토미 히데요시)이 밤마다 원귀가 나타나 잠을 이루지 못하여 원인을 물어보니 교토에 묻힌 수많은 조선인의 억울한 영혼이 하늘나라로 못가고 주변을 떠돌고 있으니 이들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이들의 무덤을 잘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대로 하니 그 후로는 더 이상 원귀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풍신수길의 시대가 가고 덕천가강(德川家康, 토쿠가와 이에야스)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풍신수길의 업적을 깍아내리는 정책에 의해 이총의 크기가 줄고 제사도 지내지 않은채 방치되고 있다가 해방 이후 민단을 중심으로 이총을 보수 및 관리를 해왔다.

최근엔 일본 정부가 바로 인군에 있는 풍신수길의 무덤이 있는 풍국신사와 함께 이총을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해서 일본의 문화재로 관리해 오고 있는 것은 일면 다행스런 일이라고 본다.

본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 하시바 지쿠젠노가미[羽柴筑前守]라고도 함. 16세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시작한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해외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죽을 때까지 최고위직인 다이코[太閤:1585~98]를 지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 집을 떠나 지금의 시즈오카 현[靜岡縣]인 도토미 구니[遠江國]로 가 다이묘[大名]의 한 가신(家臣)의 시종이 되었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일본의 세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아시가루[足輕:보병]가 되었는데 쾌활한 성격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총명한 두뇌로 인해 사무라이로 발탁되었다. 노부나가가 1568년 중부 일본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는 몇몇 주요전투에 참전했다. 1573년 9월 2명의 강력한 다이묘를 패퇴시킴으로써 오미 구니[近江國] 나가하마[長浜]의 영주가 되었고 따라서 하시바 지쿠젠노가미라고 불렸다.

1577년부터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산인-산요[山陰山陽:中國地方] 지방의 정벌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빗추 구니[備中國]를 침공했다. 그는 하리마 구니[播磨國]의 히메지 성[姬路城]에 진을 치고 다카마쓰[高松]의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포위공격했다. 1582년 노부나가는 자기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고 할복자살했는데,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와 휴전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처단함으로써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오다 씨[織田氏]의 가신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씨의 영주로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2명의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1583년 히데요시는 2명의 가신 중 1명을 패퇴시키고 할복자살하게 했으며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킨 뒤 그해 오사카[大阪]에 큰 성을 지었다.

이어 그는 200년 이상이나 끌어온 내전상태를 종식시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섰다. 1584년에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던 강성한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전투를 벌였으며 승부가 분명하게 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1585년 간파쿠[關白]에 임명된 이래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리게 되었다. 그뒤 정적(政敵) 모리 데루토모와 휴전을 하고 일본 서부의 시고쿠[四']와 규슈[九州]를 정벌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을 간혹 받기도 했다. 1590년 이에야스의 원조 아래 간토[關東]와 오우[奧羽] 지방을 복속시킨 뒤 다이묘 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 연합은 전국을 장악하는 정부를 구성했다.

우선 그는 농부·상인·승려의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가타나가리레이[刀狩令]를 내렸다. 이어 일본 전역에 널려 있는 불필요한 성(城)을 철거시키는 시로와리[城割] 같은 조치를 취했다. 또한 사농공상제(士農工商制)를 도입하여 무사·농민·장인·상인의 계급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신분 차이를 명확하게 했고, 봉건사회의 신분체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각 계급으로 하여금 도시나 마을에 살도록 했다. 한편 겐치[檢地:토지측량]를 실시해 조세 징수를 고르게 하여 통일정권의 기반을 굳혔으며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검문소를 철폐했다. 또한 광물자원 개발의 장려로 화폐의 주조가 원활해짐으로써 교역이 촉진되었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히데요시는 간파쿠의 지위를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한 간파쿠'를 뜻하는 다이코가 되었다. 이어 조선침략을 준비했는데 최종목표는 중국·필리핀·인도의 정복이었다. 그러나 1592년에 처음 침공한 조선반도의 정복도 여의치 못했는데 이는 일본의 원정군 규모가 조선침략을 완수할 정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잠정적인 휴전을 파기하고 1597년 제2차 조선침략에 나섰으나 조선전투의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히데요시의 정실(正室)은 후사를 낳지 못했으며 측실이 아들을 하나 두었을 뿐인데 이 아이는 히데요시가 죽을 당시 6세에 불과했다. 2년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1603년에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세웠다.

히데요시는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혼자 공부하여 시를 지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하며 노[能] 연기도 잘 했고 선사(禪師)인 센 리큐[千利休]에게서 다도(茶道)를 열심히 배워 종종 다도회를 베풀고 솜씨를 자랑했다. 그가 추진해온 전국통일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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