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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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투스 왕국의 기원은, 오늘날 부르사라고 불리우는 프루사에서 시작된다. 프루사는 당시에는 키오스라고 불리웠는데, 후에 세워지는 비티니아 왕국의 왕인 프루시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프루사라고 개칭된 것이다. 키오스에는 원래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좌가 위치했는데, 당시 사트라프는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였다. 그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1세는 그의 아버지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적인 위치를 손에 넣었으며, 페르시아는 그를 인정하고 새로이 페르시아에 예속된 참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곳은 새로운 독자적인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고, 그는 참주좌를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에게 잇게 하였다. 아리오바르자네스가 훌륭한 통치끝에 사망하자 키오스의 통치권은 그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2세에게 넘어갔다. 미트리다테스 2세의 치하에서 키오스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이었다. 미트리다테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대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순 서약을 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가족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이후에도 키오스의 참주로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새로이 왕을 칭한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기원전 306~301)는 그들을 내버려둘 생각이 별로 없었다. 미트리다테스 2세는 기원전 302년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가 키오스의 참주좌를 이어받는다. 이 당시 미트리다테스는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기원전 306~285)와 친분을 두텁게 쌓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가족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하여 미트리다테스는 안티고노스의 추적을 피해 파플라고니아의 도시 아마시아로 도망친다. 아마시아에 의탁한 미트리다테스는 아직 힘이 부족함을 깨닫고, 여러 술책을 통해 이 도시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이 때 갑자기 안티고노스가 기원전 301년 셀레우코스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는 아나톨리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으나 그는 리시마쿠스가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안티고노스가 사라진 후 다른 디아도코이는 셀레우코스에게 대항하여 동맹을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와의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하자 폰투스 일대는 리시마코스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때를 틈타, 그 해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을 폰투스 왕국의 왕으로 선포했다.

미트리다테스 1세 크티스테스(기원전 281~266)는 분노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흑해 남안의 도시국가들과 동맹체를 결성했다. 헤라클레아 폰티카가 이런 동맹 중 가장 든든한 세력이었다. 다행히도 셀레우코스 제국은 분노에 떨면서도 소아시아의 행정 시스템 건설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폰투스 왕국은 요람에서 안심하고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는 마침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쑥밭으로 만들고 소아시아로 내려온 켈트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켈트족은 셀레우코스 제국과 페르가몬 왕국에 맞서서 자신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폰투스 왕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고, 이로 인해 왕국의 튼튼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여기에 이 지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세력을 소탕하자 왕국이 드디어 안정을 찾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1세가 사망하자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기원전 266~250)가 폰투스 왕국의 제 2대를 계승했다. 켈트족의 지지를 얻어, 다시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의 군대를 쫓아내고, 무역상의 거점이자 요새로서의 기능도 할 수 있는 아마스트리스 시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폰투스 왕국을 번듯한 국가로 세워놓은 뒤에,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자 제 3대로 미트리다테스 2세(BC 250~220)가 즉위했다. 이를 틈타 침공한 켈트족을 무난하게 물리친 후에, 그는 완연한 성년이 되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국왕인 셀레우쿠스 2세 칼리니코스의 딸과 결혼하여 왕국의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그리고 마침내 왕국의 국경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셀레우코스 2세에 대항하여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이 반란에 편승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침공하였으며, 셀레우코스 2세가 직접 지휘하는 2만명의 병력에 대승을 거두어 셀레우코스 2세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도망가는 전과를 올렸다. 그는 여기서 더 이상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드리지 않기로 하고, 딸을 새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유망주로 떠오른 안티오쿠스 3세 대왕(메가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동안 독립을 누려오던 도시국가 시노페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요새도시로서도 이름 높던 시노페의 방어는 철통같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220년 병으로 쇠약해져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제 4대 미트리다테스 3세(기원전 220~185)가 되었다. 그의 치세는 불분명한 점이 많은데, 역사적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티오코스 메가스가 이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침공을 받아 다시 약소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름이나 재위기간도 후대의 미트리다테스와 비교하여 겨우 알아낸 것이다. 미트리다테스 3세의 시대를 지나 제 5대로 파르나케스 1세(BC 185~170)가 즉위했다. 파르나케스 1세는 그동안 폰투스 왕국이 계속 노려왔던 대도시 시노페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폰투스 왕국이 흑해의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로도스는 이런 사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어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폰투스 왕국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로마는 이런 문제에 대해 개입하길 거부했다. 그러자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와 동시에 로마에 자신의 입지를 변호하는 사절을 보냈다. 사절이 돌아오자마자, 파르나케스는 곧바로 에우메네스와 카파도키아 왕국령인 갈라티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페르가몬 왕국의 초청으로 양측의 분쟁을 조정하러 온 로마 특사 때문에 전쟁을 중단해야 했는데, 파르나케스의 제안이 거절당하자 다시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 동안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은 페르가몬, 카파도키아 양 국가와 맞서 싸우는 것은 폰투스 왕국 혼자만의 힘으로는 버거운 일이라, 갈라티아와 파플라고니아를 할양하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 후에도 왕국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두 지역을 잃은 손실은 대단히 컸다.

그의 동생이 미트리다테스 4세 필로파토르 필라델포스(BC 155~150)로 즉위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찬탈로 즉위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기간 역시 불확실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확실한 사실 하나는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비티니아 왕국의 프루시아스 2세와 전쟁을 벌일 때 페르가몬 왕국에 지원군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이다. 필로파토르 필라델포스는 또 로마와의 관계 개선에 크게 성공하여 "로마의 친구"로 불리우며 국제적 지위를 공인받았다. 짧은 치세 이후 파르나케스 1세의 아들이었던 미트리다테스 5세 에우에르게테스(BC 150~120)가 제 7대로 즉위했다. 폰투스 왕국의 특징 중 하나가 왕위 계승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것인데, 그의 즉위 시기 역시 알 수 없다. 그는 숙부의 외교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로마와의 동맹정책을 유지했다. 그는 제 3차 포에니 전쟁과 아리스토니코스의 반란에 로마군의 측면을 원조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로마로부터 그 보상으로 지난날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였던 프리기아의 일부분을 얻어낼 수 있었다. 비록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이 증여는 무효라는 선언을 받았지만, 로마는 이 지역을 그대로 에우에르게테스가 통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카파도키아 왕국과의 혼인 동맹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보다도 값진 성과였다. 이는 지난날 파르나케스 1세의 실책으로 줄어든 국력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아테네와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에 기부금을 많이 내 관대한 독지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그리스인들과 우호관계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그는 시노페를 시찰하던 중 암살당했는데, 아무래도 왕위를 노리고 있던 자와 왕비, 그리고 시종이 공모하여 벌인 일 같다.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하자 제 8대로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 디오니소스(혹은 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 ; 기원전 120~63)가 즉위했다. 로마의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와 호각을 이루며 전쟁을 이끌었던 저 유명한 미트리다테스가 바로 이 인물이다. 미트리다테스 5세의 왕비였던 게스파에피리스, 그러니까 그의 어머니는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하자마자 최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에우파토르 디오니소스는 아버지가 부당하게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찬탈한 것에 대해 몹시도 분개했다. 그는 처음에는 소수파로 시작했고 어머니의 권위 아래 굴복해야 했으나, 대권을 손에 넣자마자 어머니를 폐하고 투옥시켰다. 그리고 옥좌를 견고히 하기 위해 그의 누이와 결혼했으며, 형제들을 남김없이 모두 살해했다. 그가 누이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곧 로마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는 정복 정책을 펼쳐 콜키스(오늘날의 그루지야)와 그 북쪽으로 이어진 흑해 연안의 해안지대를 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곧 스키타이의 왕이자 북방 스텝 지역의 지배자였던 팔라쿠스와 부딪혀야 했다. 여기서 에우파토르 디오니소스는 스키타이에 대한 동맹을 제창하여 크림 반도, 보스포루스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팔라쿠스는 격퇴되고 이후 스키타이는 지리멸렬해졌다.

이리하여 자신의 실력을 입증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3세와 손을 잡고 파플라고니아갈라티아에 침공하여 그곳을 분할한다. 비티니아 왕국은 그 직후 반(反) 폰투스 동맹을 결성했는데, 이에 분개한 미트리다테스는 이제는 비티니아 왕국을 침공한다. 비티니아 왕국은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상실하였는데 그 사이 니코메데스 3세는 사망하고 니코메데스 4세가 왕위를 이었다. 미트리다테스는 신속히 비티니아 왕국군을 괴멸시키고 프로폰티스 해협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유도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신의 수도를 그리스 도시국가였던 시노페로 옮기고 모든 왕족에게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식 풍속을 익히는 한편, 자신들의 혈통을 고대 페르시아 왕가에서 찾도록 명령했다. 곧 미트리다테스는 로마를 적으로 선포하고 자신을 "키루스 대제의 적법한 후계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메가스의 화신"으로 선전했다. 그의 군대는 에게 해를 건너 아테네 시민들의 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입성했으며, 그의 해군은 로마 해군을 로도스 섬에 가둬두는 데 성공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북부 아나톨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를 독점하는 강력한 왕국을 구축하게 되었다. 폰투스 왕국의 이런 비약적인 확장을 보자 아르메니아의 대왕 티그라네스 2세 메가스(재위 기원전 95~55)는 그와 혼인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그와 함께 운명 공동체를 결성했다. 그 직후인 기원전 90년, 그는 영내의 로마인을 모두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제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90~85)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폰투스의 장군 아르켈라오스가 지휘하는 폰투스-그리스 연합군은 로마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졌고, 결국 로마의 장군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기원전 83년, 로마는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다시 한 번 전쟁(제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선포한다. 집정관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전쟁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듬해에 로마군이 싱겁게 격퇴당하고 휴전 협정을 맺었다. 세르토리우스가 마리우스파의 잔당을 이끌며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 역시 행동을 개시했다. 기원전 75년, 제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이로써 개막했다. 처음에 로마군은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 반란이 일단락 되자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소아시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티그라네스 2세까지 가담한 폰투스-아르메니아 연합군은 루쿨루스의 뛰어난 전술에 휘말려 대패했다. 기원전 69년, 티그라네스가 새로 건설한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가 로마군에 함락당하자 전쟁은 로마군의 완벽한 승리로 기울었다. 티그라네스는 동맹을 폰투스에서 로마로 바꾸었고, 미트리다테스는 곧 아들 파르나케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는데, 결국 그는 흑해 북안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뒤를 이은 사람이 제 9대, 마지막 국왕 파르나케스 2세(기원전 63~47)이다. 파르나케스 2세는 재빨리 루쿨루스를 대체한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는데 성공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폼페이우스의 청을 받아 로마에 반대하는 도시인 파나고리아를 공격했고, 두 사람의 우호관계는 돈독해졌다. 기원전 49년 내전이 일어나자 그는 당연히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고,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하자 그의 입지가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결국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결국 젤라 전투에서 대패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희생 제물이 되어야만 했다. 그는 그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갔는데, 로마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킨 장수 아산드로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왕국은 로마인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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