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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사니아스'는 레오니다스왕의 조카였으며 스파르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페르시아군이 평소답지않게 모든 전선에 걸친 일제 파상공격이 아닌 특정 지점에 대한 공격을 가해온 것을 의심스럽게 여기고 신중하게 행동하려 하였다. 만약 언덕 저 아래 어딘가에 페르시아의 마도니우스가 미리 병력을 매복시켜 놓고서 폴리스 연합군이 앞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대재앙이 될수도 있었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런 파우사니아스의 신중한 자세는 다른 스파르타 장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적을 눈 앞에 두고도 머뭇거리는 것은 스파르타인 답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파우사니아스는 시타헤론산아래로 내려가 아소푸스강을 끼고 페르시아군 페르시아군 진영과 대치할 때도 역시 공격을 보류하였다. 그것은 공성전에 대한 경험도 없고 무기도 없었던 스파르타군은 강을 건너서 전면전을 감행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스파르타 군에겐 다소 거만하고 게으르며 우유부단 한 것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하였다.

페르시아군이 게릴라를 동원하여 식수에 독을 풀었을 때는, 야간 행군을 통해 식수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으로 후퇴하기까지 하였다. 아무리 작전상 후퇴라고 해도 적에게 등을 보이는 행위였기 때문에 많은 장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더욱이 야간 행군 도중 대부분 폴리스 연합은 흩어져, 동이 틀때까지 예전 진지에 도착한 것은 오직 스파르타군 뿐이었다.

그런데 스파르타군이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다른 연합군이 합류하기 전에 그들을 총 공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마도니우스는 상대가 스파르타군이며 유리한 언덕지형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지나쳐 버렸다. 언덕지형에서 진영을 정비하고 있던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군이 추격해 오는 것을 보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 반격을 시작하였다.

페르시아군은 한꺼번에 언덕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스파르타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반면 페르시아군이 요새밖으로 나와주기만을 바라고 있던 파우사니아스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아타바주스장군 아래 소아시아로 철군하였지만, 마도니우스는 끝까지 그리스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플라테아 전투에서의 승리는 다소 행운이 따른 것이긴 하였지만, 스파르타군의 강력한 전투력이 있었기에 그 행운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제 파우사니아스는 거만하고 공격하길 꺼려하던 장교에서, 페르시아군을 몰아낸 최고의 영웅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의 명예는 페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레오니다스왕과 대등한 것이었다. 그는 헬라스 동맹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페르시아의 세력을 소아시아로 몰아내고 사이프러스 원정을 수행하는 영광을 얻는다. 플라테이아 전쟁이 있은 지 다음해인 기원진 478년에는 동방으로 건너가 페르시아 비잔티움(=훗날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파우사니아스는, 그 당시 스파르타의 정서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그는 비잔티움에서 페르시아식 예복을 입는가 하면, 심지어 적군인 페르시아인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배풀기도 하였다. 스파르타는 언제나 앞도적인 힘에 의한 정복과 적들의 복종을 요구하였지만, 파우사니아스는 오히려 적에게 관대하고 유화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곧 스파르타인들은 파우사니아스에게 반역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비난을 퍼붇기 시작하였다.

물론 파우사니아스도 자신의 태도가 스파르타인에게 크게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파르타의 해군을 보강하여 급부상하는 아테네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남모를 고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노력도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페르시아인들에겐 위선으로 보여질 뿐이었고,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스파르타인들의 반감만을 크게 사고 말았다.

결국 그는 스파르타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재판에서 그는 반역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가 가졌던 군사지휘권은 선고받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신중하면서도 거만해 보이는 태도는, 그를 지지하지 않는 으로 몰려 추방당하고 말았다.

지휘권 박탈에 이은 추방[]

아기스 왕가 출신으로 클레옴브로토스 1세 왕의 아들이자 레오니다스 왕의 조카였던 그, 폴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플라테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동방원정을 단행하여 비잔티움을 정복한 그가 하루아침에 추방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번 잡은 권력의 끈을 쉽게 놓아 버릴 수 없었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사실상 제국주의적 모습을 갖추자, 스파르타 역시 체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요구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체제를 개편하기 위해서는 파우사니아스 자신이 권력을 잡아야 했고, 델로스 동맹을 봉쇄하고 잃어버렸던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역시 페르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비잔티움으로 들어가, 기원전 477경까지 친 페르시아 정책을 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노예(helot)들에게 비록 제한적인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노예 해방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노예반란을 부추기는 것으로 비추어졌고, 이것은 노예노동력에 경제력을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모든 폴리스 국가들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모두의 영웅이었던 파우사니아스는 공공의적으로 몰린 것이다.BC 470년 무렵 그는 페르시아와 내통합 혐위로 재차 본국에 소환되었는데, 이번에는 증거도 있었다.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어져 버렸지만 파우사니아스는 아직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의 신전으로 도피하여, 어렵사리 강제소환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곧 스파르타의 최고관리단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후 파우사니아스는 사실상 연금상태에 들어갔는데, 어느정도의 기간동안 신전내에 피신하여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신전으로 들어간 파우사니아스는, 외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신전안에 어느정도의 식량과 식수가 비축되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고갈되어 갔다. 그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점차 지쳐갔으며, BC 465년에는 아사직전에 신전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러나 그가 신전밖으로 나왔을 때는 너무 늦었다. 장기간의 굶주림에 지친 그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것이 플라테아 영웅의 최후였다.

훗날 스파르타인들은 그가 왜 그토록 적대국인 페르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였는지 이해하고 레오니다스왕과 그의 무덤을 함께 만들고 기념했다는 설도 있다. 멀리있는 적보다 가까이 있는 우방국이 더 위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안 것이다.


전 임
플레이스토아낙스
스파르타의 왕 아기어드 왕조
후 임
아게시폴리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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