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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스테네스 [Cleisthenes of Athens, 기원전 570경~ 508경]는 아테네의 정치가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아테네 시의 최고 행정관(아르콘)을 지냈다(기원전525~524). 귀족세력을 견제해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와 연합했으며(기원전 508) 민주적 개혁을 시행했다. 그의 혁신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개개인이 정치적 책임을 씨족의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지역 시민으로서 맡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예로부터 아테네의 지도층이었던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메가클레스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사회의 배척을 받고 있었다. 기원전 632년경 아테네의 귀족 킬론이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고 스스로 참주가 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메가클레스는 아테네의 최고 행정관이었다. 킬론의 몇몇 추종자들은 제단으로 도망쳤으며 자신들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은 뒤 제단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당했는데 이는 메가클레스에게 책임이 있었다. 델포이 신전 아폴론의 신탁에 따라 알크마이온 가문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내렸으며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크마이온 가문은 BC 594년 입법자 솔론이 내란종식을 위해 소환되었을 때 아테네로 돌아왔다. 메가클레스의 아들 알크마이온은 델포이를 지키기 위한 신성 전쟁 때 시키온의 강력한 군주(그의 이름 역시 클레이스테네스였음) 및 테살리아에 맞서 아테네인을 이끌고 싸웠다. 이후 시키온의 참주는 자신의 딸 아카리스테의 남편으로 알크마이온의 아들인 메가클레스(할아버지 이름을 땄음)를 골랐다(기원전 574경). 이들의 첫아들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클레이스테네스라고 이름지어졌다.

솔론의 개혁 이후 아티카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구귀족은 솔론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여 대세를 역전시키려고 열망한 반면 평민측은 솔론의 개혁이 불충분했다고 생각했다. 옛날의 과오로 귀족층과는 멀어진 알크마이온 가문은 솔론의 개혁에 입각한 중도적인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귀족층과 평민층은 기원전 560년 빈민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군사적 명성의 소유자인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권력을 양도해야 했다. 그와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다 실패한 알크마이온 가문은 곧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 가담했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전력을 키워 그들을 패배시켰으며 알크마이온 가문 사람들은 다시 아티카를 떠나야 했다(기원전 546). 당시 25세였던 클레이스테네스는 이후 20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사실은 더이상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마도 페이시스트라토스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알크마이온 가문은 신성전쟁에 참여해 델포이인의 환심을 샀고 기원전 548년경 불타버린 아폴론 신전 복구에 기여함으로써 더욱 큰 지지를 받게 되었다.

아테네의 아고라 발굴 때 발견된 역대 아르콘들의 명단에는 클레이스테네스가 기원전 525~524년에 수석 아르콘을 지냈다고 나와 있다. 기원전 527년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히피아스는 참주정에 가장 반대했던 귀족계층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화해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514년 자기 형제가 살해당하자 이에 놀란 히피아스는 점점 더 강압적으로 나왔고 이 틈을 타 기원전 512년 알크마이온 가문은 다른 귀족들과 힘을 합쳐 반격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델포이의 원조에 힘입어 사태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델포이는 스파르타인들에게 아테네에 자유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신탁을 계속 내렸고 결국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에서 히피아스와 그의 가족들을 몰아냈다.

참주정이 무너진 뒤에 이어진 권력 투쟁에서 클레이스테네스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기원전 508년에는 반동 귀족들의 지도자격인 이사고라스가 수석 아르콘에 뽑혔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중들과 연합해 대세를 바꾼 것은 이때라고 한다. 기원전 508~507년이 지나가기 이전에 정부체제 전면 개혁의 주요골자가 민회에서 통과되었으며 알크마이온 가문 일족 중 한 사람이 이듬해 수석 아르콘으로 뽑혔다. 이미 이사고라스는 아테네를 떠나 스파르타에 개입을 요청했으며 스파르타는 이사고라스 편을 들었다. 스파르타 왕은 '저주받은 자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했으며 클레이스테네스와 그의 친척들은 다시 망명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에 민주정이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이는 당시 아테네의 정세를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이사고라스를 소규모 과두정부 수반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아테네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으며 스파르타인들은 철수해야만 했다. 아테네는 이제 추방당한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기원전 508년 민회가 내린 결정을 실행에 옮겼다.

참주정은 평민들의 경제상태를 호전시켰고 적어도 일시적이나마 귀족가문의 정치적 세력을 역제하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오래된 가문 대부분은 미래를 기대하기보다는 과거를 그리워했고 상류층의 세습특권이 뿌리째 뽑히지 않는 한 솔론의 개혁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것을 간파한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인들을 설득해 정치조직의 기반을 가문·씨족·친족에 두지 않고 지역성에 두게 했다. 공적인 권리나 의무는 데모스[區]에 소속된 시민에게만 주어졌고 각 데모스에는 시민 등록부가 설치되고 공무원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테네 시민은 더 이상 아버지의 이름만으로 신원이 정해지지 않고 자신이 속한 데모스의 이름을 곁들이거나 데모스 이름 자체가 자신의 이름이 되었다. 혈연을 기반으로 한 씨족제 4부족 대신 10개의 새로운 지역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파벌 형성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아티카는 3개의 지역, 즉 아테네 시와 근처 주택지, 해안지방, 내륙 지방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구분으로 주요 성직자 가문의 지역적 영향력은 서서히 감소된 듯하다. 이 지역 공동체는 공적 업무를 처리하는 대표 선출의 기반이 되었으며 솔론이 창설한 400인회는 500인회(각 지역 공동체마다 50명씩 배당되었지만 그 구성원 수에 비례해 데모스에서 뽑았으므로 약간씩은 수가 달랐음)로 규모가 늘어났다.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권을 적용시킨 원칙(Isonomia)은 개혁가들의 가장 자랑할 만한 성과였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이러한 개혁들이 아테네의 전(全)시민에게 공적 생활에 참여하는 길을 더 넓게 터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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