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피두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기원전 12년)는 기원전 49년에 국내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카이사르한테 일임받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에 취임했다. 기원전 43년 3월, 볼로냐에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개시했다. 다른 이두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압하러 가 있는 동안 로마 본국을 통치했다. 그후 키케로를 필두로 한 살생부를 작성했다. 기원전 40년에 다른 이두와 브린디시 협정을 체결하고 피차의 세력권을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최고 제사장의 지위를 유지한 채 스스로 은퇴했다. 기원전 12년에 사망했다.

기원전13년, 레피두스가 사망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최고 제사장에 임명되었다.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12년, 자신의 심복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아그리파 사망, 크게 충격을 받았다. 서기 13년, 지난해까지 전선에서 계속 싸운 티베리우스에게 '최고 제사장'을 수여했다.

제사장 카이사르[편집 | 원본 편집]

27세가 되던 해 그는 제사장(폰티펙스)자리에 임명되었다. 로마의 성직자 계급은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 제사장(폰티펙스), 사제(플라멘), 점술사(아라겔)의 순서다. 로마에서 제사장은 제의를 집행하는 역할을 맡을 뿐 보통 시민과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는 귀국하자 바로 대대장(트리부누스)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로서 카이사르는 15명의 제사장중 한명이 되었고 전략단위인 2개 군단에서는 20명의 대대장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기원전 63년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제사장)자리가 빈자리가 되었다. 최고제사장은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린 사람이 취임하는 명예직이었으나 37세의 카이사르는 이 자리를 노려 당선되었다. 그는 집정관조차도 2명을 뽑을 만큼 공직의 복수 구성을 원칙으로 하는 로마에서 최고제사장만은 혼자면서도 다른 공직과 겸임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종신직으로 유일하게 관저를 제공받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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