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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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율곡 이이는 조선중기인 중종 1536년 음력 12월 26일, 강릉시에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율곡 이이는 4남 3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수는 불교적 세계관에 의거한 수용적이고 방관적인 성격을 지녔고, 어머니 신씨는 유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성격을 가졌다. 율곡은 아버지의 불교관과 어머니의 유교관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청운의 꿈을 간직한 채 어린시절을 보냈다.

율곡은 어려서 부터 비범한 천재성으로 재기가 번득였다. 10세 때에 이미 "아, 인생은 바람 앞의 짧은 100년이요, 몸은 넓은 바다 가운데 한 개의 좁쌀이다."(율곡전서)라고 할 정도로, 사유의 폭이 참으로 깊고도 넓었다. 13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상을 마치고 홀연히 금강산으로 입산수도의 길을 떠난다. 어려서부터 그의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불교에 낯설지 않았고 어머니의 죽음앞에 삶의 외로움과 고독함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절감하였을 것이다.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 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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