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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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흠(劉歆; ?~23)은 자가 자준(子駿)이며, 기도위(騎都尉), 봉거광록대부(奉車光祿大夫)의 벼슬을 하였다. 결국 유향은 30여 년이나 중용 되는 일 없이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홍후(紅侯) 유흠 (劉歆)이 유향의 삼남이다. 《좌씨춘추》가 《춘추좌씨전》으로 체재가 정비된 것은 전한(前漢) 말 유흠(劉歆) 이후의 일로 추측된다.

한나라 유흠(劉歆)이 펴낸《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서한(전한)의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48-33)는 아리따운 후궁들이 많았지만 일일이 다 볼 수가 없어서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보내어 초상화를 그려 바치도록 한다. 모든 궁녀들이 자신을 예쁘고 그려달라고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지만 왕소군(王昭君)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황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운 자태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림 속에 후궁의 빈을 위하여 초상화를 그리는 자가 있는데, 바로 모연수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전한말 대경학가 유흠(劉歆)의『칠략(七略)』을 수록한『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예학과 인의를 벗어나 청허(淸虛)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도가는 유가, 음양가 등과 더불어 제자류(諸子類) 십가(十家)로 분류되었지만, 참된 성명(性命)을 보전하고 생사(生死)의 경계를 넘나드려는 신선가(神僊家)는 의경가(醫經家), 경방가(經方家, 의약 침술), 방중가(房中家)와 더불은 방기류(方技類) 4가 중의 하나로 분류되었다. 말하자면 신선가에는 노장자의 도가가 개입되어 있지 않으며, 도가에는 신선가가 관심을 두는 방선술의 관점이 없는 것이다.

공양학(公羊學)[]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비롯한 금문경서(今文經書)를 중요시하는 학문. 역사적으로는 전한(前漢)시대와 청대(淸代) 후반에 행해졌는데, 특히 후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춘추시대의 노(魯)나라 역사기록인 《춘추》에는, 그 해석으로서 《공양전》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의 3전이 있는데, 전한의 무제(武帝)가 동중서 (董仲舒) 등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유학을 정치원리로 사용하여 박사관(博士官)을 설정, 경학을 전수(傳授)시켰을 때, 선진(先秦)시대의 고문경서가 아닌 금문(今文;전한시대에 통용했던 예서)으로 쓰여진 경서를 교과서로 하였다.

또 당시의 경학은 경술(經術)이라고도 하여 정치의 실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고, 특히 《춘추공양전》은 천하통일 이념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중시되었고, 한대의 춘추학은 실제로는 공양학을 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한 말경, 유흠(劉歆)이 《춘추좌씨전》을 위시한 고문경서를 소중히 여기고 왕망이 정권을 잡아, 고문경서를 박사관의 교과서로 한 다음부터 공양학은 쇠퇴하고, 후한시대에 하휴(何休)가 《춘추공양전해고》를 엮기는 하였지만, 학계에서는 훈고를 중히 여기는 고문학이 주류가 되었다.

그 뒤 청대 중엽에 이르러, 창저우〔常州〕의 장존여(莊存與, 1719∼88)가 《춘추정사(春秋正辭)》를 지어 공양학을 현창(顯彰)하였고, 계속해서 유봉록(劉逢祿)이 하휴의 공양학을 중히 여겨 《좌씨전(左氏傳)》은 유흠의 위작(僞作)이라고 지적하였으며, 또 공자진·위원(魏源)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고증학적 학풍을 비판하고, 현재 쓰러져 가고 있는 왕조체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하휴의 공양학에 근거를 둔 <변(變)>의 관념을 강조했다. 그러나, 공양학을 가장 존중하여 정치변혁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던 것은 무술변법(戊戌變法, 1898)의 지도자 캉 유웨이〔康有爲〕였다.

그는 공양학의 삼세설(三世說)을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의 거란세(據亂世)·소강세(小康世)·대동세(大同世)에 배당하고 나아가 서구의 사회진화론과 결부시켜, 3단계의 역사발전을 생각하여, 입헌군주정체론을 실현시키기 위해 당면의 거란세에서 소강세로의 전개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의 쿠데타에 의하여 변법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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