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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 [Wei Cheng, 魏徵 580~ 643]은 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정치가. 중국을 동 시대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태종 곁에는 바른 말로 주군을 모신 신하 위징(魏徵·580∼643)이 있었다. 자는 현성(玄成). 거록군(鉅鹿郡) 곡양(曲陽: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진양[晉陽]의 서쪽) 사람이다. 위징은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가난하여, 출가해서 도사(道士)가 되었다. 617년 이밀(李密)의 부하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위징은 원래 태종의 형 건성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621년 이건성(李建成)의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어 이세민(李世民:나중에 太宗)을 죽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즉위 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벌을 주지 않고 발탁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중용했다. 629년 비서감(祕書監)으로 조정에 들어가 비부도서(祕府圖書)를 교정하여 〈군서치요 群書治要〉의 편찬을 주도했다.

636년 양(梁)·진(陳)·북제(北齊)·북주(北周)·수(隋)의 5개 왕조에 대한 역사편찬을 주도한 공으로 광록대부(光綠大夫)에 임명되었고, 정국공(鄭國公)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항상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대답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태종에게 수나라가 망한 것을 역사의 거울로 삼아 부역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현명한 신하를 중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도록 권했다. 위징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태종은 이에 대해 화를 내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20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위징의 간언은 태종이 훗날 동아시아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모범이 된 '정관(貞觀:태종의 연호)의 치(治)'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관 19년, 위징이 죽은 지 이미 2년이 지난 해, 요동 정벌에 실패한 이세민의 군대 행렬이 장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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