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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圓光, 542년 ~ 640년)은 신라 진평왕 시대의 유명한 승려이자 학자이다. 세속에서의 성은 박씨이다. 원광 법사(圓光 541~630)는 초등학생도 알만한 유명 스님이다. 세속오계를 지었기 때문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경주 안강의 삼기산(三岐山)에 금곡사(金谷寺)를 창건하고 수도하였다. 34세에 주술을 좋아하는 한 승려가 와서 가까운 곳에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는데, 원광이 그 승려의 잘못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다가 화를 입어 죽었다. 이에 불교 공부를 더 깊게 하여 사람들을 제도하겠다고 발심하고 589년(진평왕 11)에 진(陳)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의 금릉(金陵) 장엄사(莊嚴寺)에 머무르면서 민공(閔公)의 제자로부터 강의를 들었으며, 그 뒤 여러 강석에 다니면서 성실론(成實論), 열반경 등을 공부한 뒤, 오(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선정에 힘을 기울였다.

남북조(南北朝)로 갈라져 있던 중국이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 된 후, 장안의 흥선사(興善寺)로 갔다. 그곳에서는 섭대승론(攝大乘論)에 대한 연구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섭론종(攝論宗)의 논서들을 연구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중국 불교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설법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자주 청하였다.

600년에 조빙사(朝聘使) 나마제문(奈麻諸文)과 대 英씹념大舍橫川(?)을 따라 귀국하여 유학 전에 머물렀던 삼기산에 머무르면서 임금과 신하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으며 대승경전을 강의하였다.

그 뒤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귀산(貴山)과 추항( 項)이 찾아와서 종신토록 지닐 계명(誡銘)을 구하자 당부한 것이 세속오계였다. 세속오계는 뒤에 화랑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특히, 살생은 불교 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 사회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 윤리가 요청되었으며, 이에 따른 그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면을 나타내는 것이 되고 있다.

613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皇龍寺)에서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법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최상석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왕이 병이 들어 의약으로 고칠 수 없을 때에는 법을 설하고 계를 주어 참회하게 함으로써 병을 치유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수계(授戒) 참회의 법으로써 깨우치고자 가서사(嘉栖寺)에서 점찰 법회(占察法會)를 정기적으로 베풀 기금(寶)을 마련하였다.

원광의 역사적 위치는 시대를 배경하여 살펴볼 때 크게 3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그는 신라의 승려로서 대승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다. 저술로서 여래장경사기 (如來藏經私記) 3권과 여래장경소(如來藏經疏) 1권 등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여래장 사상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래장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 불교의 토착화에 크게 노력하였다. 재앙을 쫓고 병을 고치는 주술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당시의 주술을 불교의 수계와 멸참(滅懺)의 법으로 대치시킴으로써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였다. 가서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고, 임금의 병을 수계·멸참으로 치료한 것 등이 그 일례이다. 셋째,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깊은 소양을 쌓아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귀산·추항 두 사람에게 세속오계를 주고, 진평왕의 명을 받아 걸사표를 쓴 것 등이 그러한 면을 입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부도가 명활성의 서쪽에 있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 금곡사지에 있는 폐탑이 그의 부도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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