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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10월 6일)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왕망은 지체높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 아버지의 이복 동생인 왕씨(王氏)가 한(漢)나라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 원제(元帝)가 사망하자 황후가 되었고, 이로 인해 그녀 자신과 그녀의 문벌은 더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왕황후의 아들이며, 왕망의 사촌인 성제(成帝)는 인품이 좋았으나 유약하고 무책임하여 정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외척 가운데 4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섭정으로 임명했고, 이들 가운데 마지막 섭정을 지낸 사람이 기원전 8년에 은퇴했다. 이 기간 동안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원자가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관직운은 불투명했다.

기원전 22년 그는 궁중에서 비교적 낮은 지위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기원전 16년 큰아버지 봉(鳳)의 추천으로 신도공(新都公)이라는 귀족작위를 받았다. 기원전 8년 11월 28일 마침 비어 있던 섭정직에 임명되어 정치적으로 좋은 기회가 다가오는 듯했으나, 기원전 6년(또는 기원전 7) 성제의 조카인 애제(哀帝)가 등극하여 정치적 상황이 일변했다. 신임 황제 애제는 왕씨 가문도 아니었고 또 그 가문을 좋아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왕망을 파면시켰다. 그는 BC 5년 여름까지 장안(長安)에 남아 있다가 그뒤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기원전 1년 8월 애제가 죽었는데,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왕망의 정치적 생명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같은 날 그의 고모인 왕황후가 그를 수도로 불러 다시 섭정직에 임명했다. 그는 재빨리 조정 안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신임 황제인 평제(平帝)의 황후로 책봉하여 정권의 기반을 잡았다. 평제가 서기 6년 2월 3일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왕망의 정치적 위치도 불안정해졌다. 또 그의 반대파들은 그가 평제를 독살했다고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는 50명에 달하는 후계자 가운데 겨우 2세인 영(嬰)을 황제로 선임함으로써 후계문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해결했다. 그는 6년에 가황제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이때 왕망은 황족과 그 지지자들로부터 산발적인 반대에 부딪쳤으나 손쉽게 진압했다. 그는 조직적인 대규모 선전공세로 한의 국운이 다했고, 새로운 국가에 대한 천명이 자신에게 내렸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9년 1월 10일 그는 황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신이라고 했다.

왕망은 그 아버지의 이복 동생이 황후가 되자, 그 황후의 도움으로 섭정이 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찬탈자”로 알려져 있으며, 시호는 가황제(假皇帝)·섭황제(攝皇帝)이다.

한나라는 왕망의 신(新)나라에 망하는데 15년 뒤 신은 망하고 왕망은 역적이 된다. 이 왕망이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의 이모부다. 왕망의 외가였던 김일제 후손은 달아나야 했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이자 독실한 유생(儒生)이었으며, 그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미신을 믿는 일종의 현학자(衒學者)였다. 그의 재정·농업 정책은 한대의 관습과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으며 법을 어겼다고 하여 아들 3명, 손자 1명, 조카 1명을 처형했다. 그는 면학과 폭넓은 지식의 수용을 권장했다. 그의 대외정책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만 아니었더라면 그의 나라는 지속될 수도 있었다. 2, 5, 11년 등 3차례 이상 황허 강[黃河]이 진로를 바꾸어 중국 최고의 인구 조밀 지역을 범람했다.

여러 번에 걸친 수해로 인구감소·기근·전염병 등이 생겨 사회불안이 증가하고 반란이 터지면서 사람들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농민 봉기는 그 규모가 점차 커졌으며, 이같은 농민군의 하나인 적미(赤眉)는 18년부터 규모가 커져 왕망의 관군을 격파했다. 수도지역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23년 10월 4일 반란군은 수도의 동쪽 성벽을 뚫고 침공해왔다. 몇 시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반란군들은 저녁 무렵 성벽에서 약 6.4km 떨어진 황궁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인 10월 5일 아침 수도의 백성들이 반란에 가세하여 황궁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다. 불은 점점 더 번져나갔고 싸움은 그날 내내 계속되었다. 왕망은 자줏빛 의복을 입고 제왕의 인장(印章)을 흔들며 마법의 힘을 빌려 황궁을 지키려고 했다. 그는 음식도 전혀 먹지 않아 점점 더 쇠약해져갔다. 그해 10월 6일 새벽에 그는 전차(戰車)로 미앙궁(未央宮)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1,000명 이상이나 되는 측근과 마지막 저항을 벌였다. 그들은 화살촉이 다 떨어질 때까지 수비를 했고, 그후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오후 늦게 반란군이 미앙궁으로 몰려들어왔고, 왕망은 측근과 함께 피살되었다.


전 임
(사실상)한 유자영 유영
제1대 황제
8년 - 23년
후 임
한 경시제
전 임
(사실상)한 유자영 유영
중국 황제
8년 - 23년
후 임
한 경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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