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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샤트는 카르타고를 건국한 여왕이다. 전설에 의하면 카르타고의 건국은 기원전 814년에 이루어졌다. 건국의 주인공은 디도(Dido) 혹은 엘리사(Elissa)라 불리워지는 여왕이었다.

디도는 그리스로마 문헌에 나오는 이름으로, 그녀는 로마 시인 버질의 작품 아이네이드에 주어진 설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약간의 문헌에서 그녀는 엘리사(Elissa)로 알려져 있다. 엘리사라는 이름은 아마도 페니키아의 엘리샤트의 그리스식 표기이다. 디도라는 이름은 라틴 저자에의해 사용되었는데 방랑자 또는 집시를 의미한다. 디도 여왕의 전설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출처를 모르는 전설이고, 또 하나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아스를 통해져 내려온다.

디도는 포에니키아 항구도시 튀로스의 공주로 부유한 삼촌 쉬카에오스(혹은 시카르바스)와 결혼했다. 튀로스의 왕이자 엘리사의 오빠인 퓌그말리온이 쉬카에오스를 살해하자, 위협을 느낀 디도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도망쳤다. 그 지역의 통치자 라르바스는 소가죽으로 덮은만큼의 땅을 디도에게 팔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혜로운 디도는 소가죽을 띠모양으로 잘라 광대한 크기의 땅을 에워쌌다. 그리고는 그곳에 카르타고라는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카르타고는 후에 무역과 군사력에 있어 로마 제국의 강력한 경쟁국이 되었다.

카르타고가 번성하기 시작하자 라르바스는 자기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디도를 협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디도는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서 칼로 자결하였다.

또 하나의 전설인 '아이네이아스'에 따르면, 디도는 아이네이아스로 인해 자살을 했다. 트로이에 적대심을 갖고 있는 유노는 트로이가 함락된 후 목숨을 건져, 아이네아스 지휘아래 시칠리아로 피신하는 트로이 함대를 파멸 시키려고 한다. 바람의 신 아이올루스는 유노의 명령으로 트로이 함대가 풍랑에 휩쓸리도록 하지만, 넵투누스의 개입으로 함대는 구출되어 카르타고항으로 피신을 한다.

유피테르는 베누스에게 트로이 유랑민이 라비니움에 정착한 후, 알바 롱가를 거쳐 로마를 건설하게 되리라 예언한다. 메르쿠리우스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트로이 유랑민에게 호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편 아이네아스는 사냥군으로 변장한 어머니 비너스를 만나 카르타고와 디도에 관해 정보를 얻는다. 얼마 후 아이네아스와 그가 이끄는 유랑민은 디도로부터 환영을 받음과 동시에, 디도는 비너스의 영향으로 아이네아스에게 호감을 갖는다. 환영 만찬회에서 디도는 트로이의 최후와 아이네아스의 7년간에 걸친 유랑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 줄 것을 청한다. 그리하여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몰락과 정처없이 떠도는 자신의 신세에 대해 소상히 말해주었다.

디도는 남편과 사별 후에 스스로에게 독신을 다짐했건만, 아이네이아스 아들 아스카니우스로 둔갑하여 찾아온 에로스는 그녀에게 화살을 날렸다. 어느 날 폭풍을 피해 동굴에 들어간 두 사람,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로 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야하는 자신의 임무도 잊은 채 카르타고에 정착했다. 그러나 신들에 의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꺠닫게 된 아이네이아스는 디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홀로 남겨둔 채 카르타고를 떠났다.

실연으로 절망에 빠진 디도는 아이네이아스가 남기고 간 물품들을 모두 태워버릴 생각으로 언니들에게 장작더미를 쌓아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높이 쌓인 장작더미에 올라간 디도는 떠나가는 아이네이아스의 배를 보게 되었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그가 남기고 간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이 때 불타는 장작에서 나온 연기는 바다 건너 트로이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 결과를 보면 기원전 750년경에 건설된 듯 하다.

건국 초기(기원전 8, 7세기경)편집

카르타고는 지중해가 가장 좁아지고 따라서 양쪽 대륙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데 힘입어 제해권을 장악하기에 이상적인 도시였다. 카르타고는 수십 년간 티로스의 충실한 子도시였지만, 기원전 7세기에 모도시가 아시리아, 이후에는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서쪽 페니키아 식민시를 통제하고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지중해 가운데의 가장 좁은 지점이자 아프리카와 유럽 대륙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카르타고는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지중해 최강의 해군을 건설했고, 그리하여 과거 페니키아 식민시와, 동쪽의 벵가지부터 서쪽의 지브롤터와 포르투갈에 이르는 지역(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일부, 발레아레스 제도 등)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800년대에 페니키아인들이 사르디니아에 최초로 주둔했으며 기원전 770년에는 스페인 가디르에서 은광 입구 발견했다. 하지만 기원전 700년부터 기원전 500년까지 남부 이탈리아, 남부 프로방스, 안달루시아(Andalusia), 사이레나이카(Cyrenaica)의 대규모 그리스 식민화가 카르타고령을 에워싸는 등, 그리스의 해외식민지 건설도 박차를 가하여 카르타고의 해외 진출에 장애가 되었다. 기원전 654년에는 카르타고가 아이비자(Ibiza)의 발레아릭섬(Balearic Islands)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기원전 600년에는 카르타고가 마실리아(Massilia, Marseilles)의 포카이안(Phocaean) 그리스 식민지를 방해하는데 실패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에 면해 있으면서 동시에 육지에 비옥한 경작지를 소유한 탓에 농업에 종사한 가문들과 상업에 종사한 가문들 사이의 오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상업 중심파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이르면 지중해 서부의 헤게모니를 확립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기원전 6세기 초반, 항해자 한노가 60척의 함대를 통솔하여 아프리카 7도 해안가까지, 지금의 시에라리온 근처까지 항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노 주항기>라는 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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