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파미논다스 [Epaminondas, 기원전 410경 테베~ 기원전 362 만티네이아]는 테베의 정치가·군사전략가·지도자이다.

에파미논다스는 테베 귀족의 아들로 집안은 가난했으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 에파미논다스(BC 410? - BC 362)는 펠로피다스와 마찬가지로 테베스의 명문 출신이었다. 부자였던 펠로피다스가 그의 재산을 나눠주겠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은 펠로피다스의 신세를 지며 그의 호의와 친절을 고맙게 받았으나, 에파미논다스가 짜낸 새 전술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보병 전술을 뒤흔들고 그리스 세계의 전술사상 커다란 혁명을 일으켰다.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이 '에파미논다스의 사선진'이다. 이것은 강력한 스파르타군이 주로 방진의 우익에 정예부대를 배치시키는 전법을 쓴다는 걸 역이용하여 좌익을 매우 강화하여 적의 주력을 공략하였다.

스파르타의 군사적 우위에 쐐기를 박았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세력균 형을 이후 계속 유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패배시키고(기원전 371), 펠로폰네소스 원정을 성공시켰으나(기원전 370~369, 369~368, 367, 362), 마지막 원정에서 전사했다. 에파미논다스는 테베 귀족의 아들로 집안은 가난했으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 특히 철학에 관심을 보인 그는 당시 테베에 정착해 살던 피타고라스 학파 철학자인 타렌툼 출신 리시스의 열성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에파미논다스는 처음에는 정계에 몸담지 않았으나 군사 원정에는 참여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385년 전투에서 동료인 펠로피다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기원전 382년 스파르타인들은 북부 그리스로 원정을 가 테베인 몇몇과 공모해 쿠데타를 일으켜 테베의 권력을 잡으려 했다. 3년 6개월 가까이 테베 정부는 카드메이아(테베의 성채)에 주둔한 스파르타군의 지원받는 소규모 독재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펠로피다스를 포함해 예전의 테베 지도자들은 대부분 추방당했다. 그러나 펠로피다스 는 비밀리 아테네에서 돌아와 결국 독재정을 기원전 379년 무너뜨리고 스파르타의 주둔군을 기습해 항복을 받아냈다.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던 에파미논다스가 이때 테베에서 민중봉 기를 주도했다고 한다. 이후 8년 동안 테베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를 전투에서 패배시켰으며, 보이오티아 지방의 도시동맹을 다시금 주도하게 되었다. 기원전 371년 평화조약 회담이 이루어져 전쟁은 끝났으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각 도시가 개별적인 자격으로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테베의 동맹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테베는 이에 맞서 보이오티아 동맹은 하나의 독립 단위라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보이오타르크(동맹의 행정관 5명 가운데 하나)였던 에파미논다스는 테베가 평화조약 적용에서 제외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주장을 고수하겠다고 했다. 스파르타는 테베 서부국경에 군대를 주둔시켜놓고 군사적 압력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레욱트라 전투(기원전 371)에서 에파미논다스는 혁신적인 전술을 썼다. 그는 장갑보병 앞에 기병대를 배치해 전진하는 일반적인 전술을 피하고 좌측부대에 50명 단위의 장갑보병을 밀집시켜 12명 단위로 조를 짠 스파르타 군대에 맞섰다. 그리스의 보편적인 방식대로 우측에 가장 우수한 부대를 배치했던 스파르타군은 테베군의 진격에 맞설 수 없었다. 이 전술의 새로운 점은 적군의 취약부분이 아닌 최강부분을 먼저 공격해 세력을 꺽자는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이 전투에서 아주 유능한 장군들을 많이 잃었으므로 이후 군사를 일으키는 데 아주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되었다. 보이오티아 동맹은 살아 남게 되었으며, 1년 뒤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베군은 그 여세를 몰아 다시 활동을 벌였다.

기원전 370~369년 겨울(보통 그리스의 군사활동이 정지되는 계절임)에 에파미논다스의 테베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공해 에우로타스(지금의 에브로타스) 강 유역까지 침투했다. 그때까지는 200년 동안 한 번도 스파르타 본토 내에 적군이 침입한 적이 없었다. 당시 스파르타의 거주민들 중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던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에파미논다스는 메세니아(이곳의 주민들은 300년 가까이 스파르타의 노예였음) 지방에 다시 도시국가를 부활시켰다. 그는 또한 스파르타와 동맹관계를 파기한 아르카디아 지방 사람들을 설득해 아르카디아 동맹의 중심지로 메갈로폴리스('커다란 도시')를 세우게 했다. 이러한 정치적 조치로 스파르타의 활동은 저지당했고, 이후 펠로폰네소스 반도 외곽에서는 더이상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는 이렇게 빛나는 전과를 세웠지만 테베 국내에서 그를 시기하는 정적들과 맞서야 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은 직책의 임기를 넘길 때까지 국외에 나가 있었으므로 돌아오자 곧 탄핵을 받았으나 혐의를 벗었다. 기원전 369~368년 보이오티아 동맹국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아 2번째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공해 성공을 거두었다.

기원전 367년에는 일반군인으로서 페라이(테살리아) 참주 알렉산드로스에게 붙잡힌 친구 펠로피다스를 구해내기 위한 부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다른 원정이 실패에 처할 지경에 이르자 에파미논다스는 장군에 임명되어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했다. 이 덕분에 그는 보이오타르크로 재선되었으며, 직후 다시 테살리아로 가서 펠로피다스를 구출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기원전 366년 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테베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여겨 3번째로 침공을 시도했다. 그는 이 지방의 몇몇 도시국가들로부터 충성을 약속받았는데, 이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스파르타가 이 도시에 세운 과두정부를 전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테베 정부는 그 도시에서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에파미논다스의 결정에 맞섰다.

테베가 스파르타를 지지하던 아테네와 전쟁에 돌입한 뒤 에파미논다스는 기원전 364~363년 아테네의 해군력에 도전한다는 대담한 시도를 감행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새로 만든 보이오티아의 함대를 이끌고 비잔티움으로 갔으며, 결국 아테네 제국의 여러 도시들은 당시 종주국이던 아테네 제국의 위협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아르카디아 동맹이 내란에 휩쓸리자 에파미논다스는 대규모 연합군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로 4번째 원정을 갔다. 그는 만티네이아 전투(기원전 362)에서 아테네·스파르타 및 그들의 동맹군과 맞섰고, 레욱트라에서 썼던 전술을 대규모로 재연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으나 야전에서 입은 상처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테베의 패권은 사그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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