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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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스 2세(~기원전 401년)는 스파르타의 17대 에우리폰티드 왕이였다. 그는 아르치다무스 2세의 장남으로 아게실라우스는 그의 이복형제였다. 그는 아기어드 공동왕 파우사니아스와 함께 다스렸다. 아기스는 기원전 426년 그의 아버지 아르치다무스 2세를 계승하였다. 그리고 28년 남짓 다스렸다. 기원전 426년 여름에 그는 아티카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펠로폰네시아 동맹군을 이스트무스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연이은 지진으로 더이상의 진군이 지연되었다. 다음에 봄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아티카로 들어갔지만 15일만에 포기하였다.

기원전 419년 아르고스는 알치비아데스의 선동으로 에피다루스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아기스는 라케다에몬의 전차군대와 함께 동시에 출격하여 전방의 도시 레욱트라로 진군하였다. 투치디데스가 말하기를 이 원정의 목적은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아마도 에피다루스를 선호하여 우회하였다. 레욱트라에서의 희생의 선호되는 않는 측면은 그를 진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그리하여 그의 군대를 후퇴시켜서 카르네아 축제의 성스러운 달 말에 원정이 준비되게 동맹군에게 순회 연락을 보냈다. 그리고 아르고스가 에피다우루스에 공격을 반복할 때 스파르타 인들은 다시 전방의 도시 카리아로 진군하였다가 다시 후퇴하였다. 희생물의 특색을 설명해준다. 그다음해 여름 기원전 418년 에피다우리아인들은 아르고스 인들에 압박을 받고 라케다에모니아인들은 그들의 군대와 함께 아기스의 지휘아래에 아르골리스로 침입하였다. 능숙한 책략으로 그는 아르고스를 가로채는데 성공하였고 그의 군대를 그들과 도시 사이에 기회를 살려 보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아르고스 장군 트라실루스와 알키프론은 아기스로 와서 네달 동안 휴전을 맺을 것을 그에게 종용하였다.

아기스는 그의 동기를 드러내지 않고 그의 군대를 후퇴시켰다. 그가 돌아오자 그는 아르고스를 축소시킬 기회를 버렸음에 대해서 심하게 비난받았다. 특히 아르고스가 그의 귀환에 의해 제공되는 기회를 잢았기 때문이다. 그의 집을 무너뜨리고 은화 10냥을 그에게 주는 것이 제안되었으나 그의 정성어린 간청로 인해 그들은 10명의 스파르타인들로 구성된 전쟁자문위원회를 임명함과 동시에 스스로에 만족하였다. 전쟁자문위없이는 그는 도시밖으로 군대를 이끌수가 없었다. 직후에 그들은 테게아로부터의 즉시 군대를 투입하지 않으면 도시내의 친 스파르타왕이 항복을 강요당할 거라는 첩보를 받았다. 그는 테게이에서 안정성을 회복하고 만티네아로 진군하였다. 만티네아로 물길을 돌려 홍수를 일어켜 만티네아와 아테네군을 물에 빠지게 만들었다. 전투는 판가름이 나고 스타르타는 승리의 분위기였다. 만티네아 전투는 그리스 도시국가간의 전투중에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로 사료된다.

기원전 417년 아르고스에서 반혁명의 뉴스가 스파르타에 도착하였다. 아르고스에서 과두의 친스파르타당이 전복되었다. 군대는 아기스의 지휘로 투입되었다. 그는 패한 친스파르타 파를 복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르고스가 바다로 옮기기 시작한 긴 성벽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휘시아에를 취하였다.

기원전 413년 봄에 아기스는 펠로폰네시아 군대와 아티카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데켈레아를 요세화하였다. 같은 해 겨울 시칠리아 원정에서 불운의 소식이 그리스에 도착하였다. 그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스파르타 동맹군에 기여를 징수하였다. 함대를 구성하기 위해서였다. 데첼레아에서 그는 스파르타 정부와 대개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이 영향을 받지않은 동맹에서 사신을 받았다.

보에오티아와 다른 스파르타 동맹과 같이였다. 그는 펠레폰네시아 전쟁의 종료시까지 데첼레아에 머문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11년 400인의 운영 기간 동안 그는 아테네 그 자체에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를 하였다. 후에 펠로폰네시아 전쟁의 촛점은 아시아로 이동하였다. 리산더아테네 장악에 더 큰 역활을 하였다. 승리가 확보되자 아기스는 그의 아기어드 공동군주 파우사니아스를 반역으로 변경하였다. 그러한 파우사니아스는 석방되었다.

기원전 407년 악명높은 충성스럽지 못한 엘리스에 대항한 전쟁의 지휘가 아기스에게 맡겨졌다. 그는 세번째 해에 엘레아 인들을 화친을 하도록 억압하였다. 그리고 스파르타 인들이 올림픽과 희생에 참여하도록 허락하게 하였다. 그가 델파이에서 돌아올 때 그는 아르카디아의 헤라에아에서 병들고 스파르타에 돌아온지 며칠만에 죽었다. 그는 스파르타에 묻혔으며 아기스는 아들 레오티치다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왕좌에서 제외되었다. 합법성에 관해서 약간의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치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 있을 때 그는 아기스를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후의 저자들은 아기스는 알치비아데스를 그의 아내 테게아의 여왕과 동침하였고 레오티치데스의 아버지라고 한것은 아마도 아기스의 ... 그러나 그는 경고를 받고 스파르타를 피하였다.

전 임
아르치다무스 2세
스파르타의 왕 에우리폰티드 왕조
후 임
아게실라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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