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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실라우스 2세(기원전 444~360)는 스파르타의 왕이였으며 에우리폰티드 왕통이였다. 그는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60년까지 다스렸는데 그대부분동안 모든 그리스의 사령관과 왕들중 누구보다도 좋았다고 플루타크는 기록하였다. 그는 그의 나라의 업적과 부로 인식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러하였다.

역사

어린시절

아게실라우스는 아르치다무스 2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 에우폴리아의 아들이였다. 그는 치니스카와 남매였다. 그녀는 올림픽 승리를 달성한 최초의 여성이였다. 아게실라우스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그의 리산더와 친밀함외에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우리는 그가 그의 형제 아지스 2세를 따라서 즉위할거라고 예상 되진 않았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레오티치데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고 그리하여 아게실라우스는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커리큘럼 agoge로 훈련되었다. 그러나 레오티치다스는 결국 적통이 아니라는 것으로 밀려났다. 당시의 루머는 그를 알치비아데스의 아들로 나타냈으며 아게실라우스는 기원전 401년경 왕이되었다. 그때 나이가 40세였다. 그의 사촌부모의 의문과 더불어 아게실라우스의 계승은 그의 이전의 ....

그는 정치적인 실제의 촉진을 위해서 그에게서 의지의 도구를 찾기를 희망하였다.

초기의 치세

우리는 먼저 치나톤의 비밀 결사의 억압에서 그를 왕으로 처음 들었다. 그후 기원전 396년 아게실라우스는 2000명의 네오다노데스(자유 헬롯)과 6000동맹군과 함께 페르시아 영역에스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 시키기 위해 아시아로 건너갔다. 아울리스에서 항해 출발전 날 밤에 그는 재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그것은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전에 하였던 것과 같았다. 그로나 테베인들이 개입하여 그것을 막았다. 그것은 모욕으로 그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에페수스에 도착하였을 때 3개월 화친이 티사페르네스와 맺어졌다. 그는 리디아와 카리아의 총독이였다. 그러나 그당시 맺어진 협상은 과실이 없었다. 그리고 협상이 결렬되자 아게실라우스는 프리기아를 기습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총독 파르나바주스에게서 거대한 노획물을 쉽게 얻었다. 티사페르네스는 도움을 제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군대를 카리아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기병대를 조직하는데 경울 보내 후에 그는 기원전 395년 봄에 리디아로 성공적인 습격을 하였다. 티트라우스테스는 티사페르네스를 대신하기 위해 보내졌다. 그는 계속된 실패로 그의 인생을 소모하였다. 아미티스가 티트라우스테스와 칩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다음봄까지 약탈하였다. 그는 그후 파르네바주스와 합의하였고 한번 더 남진하였다. 기원전 394년에 테베의 평원에 캠프에 들어갔을 때 그는 내부 원정 EH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그 자신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때 그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테베, 코린토스, 아르고스에 여러 작은 도시의 연합군간의 전쟁으로 인해 그리스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테살리아인 카발리를 repulse 하였는데 그들은 그를 저항하려고 하였다. 포키아인들과 오르초메니아 군대, 스파르타 군대에의해 강화되어 그는 보에오티아내의 코로네아에서 연합군대를 만났다. 그리고 뜨겁게 경쟁하였던 전투에서 그는 기술적으로 승리하였지만 성공은 황량한 것이였고 그는 델파이를 거쳐 펠레폰네수스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 직후에 그가 전적인 지휘권을 받은 스파르타 해군은 코논과 파르나바주스 휘하의 강격한 페르시아 함대에 의해 크니두스 해안에서 완전히 격파되었다. 기원전 393년 아게실라우스는 아르골리스의 약탈 침입에 관여하였다. 기원전 292년 그는 코린티아 전쟁에 유명한 참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코린티아 영토로 성공적인 원정을 하고 레카에움과 피레에우옴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모라의 손실이 이피크라테스에 의한 파괴로 발생하였고 이들의 성공을 중립화하였다. 그리고 아게실라우스는 스파르타로 귀환하였다. 기원전 389년 그는 아르카나니아에 원정하였다. 그러나 2년 후에 안탈키다스의 평화는 아게실라우스에의해 따뜻하게 지원되었지만 적대감의 종료를 가져왔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만티네이아 스파르타의 공격에서 그의 지휘의 쇠퇴를 발견한다. 그러나 개인덕인 우정의 동기에서 필루스에 관한 그것과 카드메아의 페비다스의 장악을 공개적으로 정당화로 향하였다.

쇠퇴

테베와의 전쟁이 새롭게 발발하였을 때 왕이 두번 보에오티아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무덤과 같은 병으로 인한 활동으로 다음 5년을 소모하였다. 기원전 371년에 원로원에서 교체가 그와 테베 장군 에파미논다스 사이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의 영향으로 인해 테베는 평화에서 제외되었다. 기원전 371년 테베로 진군한 클레옴브로투스에게 주문이 주어졌다. 클레오브로투스는 레욱트라에서 패하였고 스파르타의 패권은 붕괴하였다.

기원전 370년에 우리는 아게실라우스가 만티네아로의 사신에 관여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존심과 영웅주의는 헬롯과 페리오에키 그리고 스파르타인까지의 반란과 비밀결사에 대항하여 성벽이 없는 스파르타를 보존하였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적에 대항하여 같은 해 라코니아로 침입한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네 개의 다른 군대가...

그러나 스파르타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스파르타의 패권을 회복하기르 희망하였다. 제노폰의 모호한 통과(passage)에 따라 아게실라우스의 전비 마련을 위해 기원전 364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하는 그의 반란에서 총독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기원전361년 그는 용병의 수정으로 이집트로 가서 넥타네보 1세와 그의 집정 테오스가 페르사아에 대항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곧 그의 봉사를 테오의 4촌이며 라이벌인 넥타네보 2세에게 이전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200탈란트 의 상을 그에게 주었다. 귀향하며 아게실라우스는 키레나이카에서 죽었다. 그 때 나이가 84세 였으며 41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시신은 왁스로 화장되고 스파르타에 묻혔다.


전 임
아기스 2세
스파르타의 왕 에우리폰티드 왕조
후 임
아르치다무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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