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죽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동물피를 가죽으로 가공해 사용해 왔는지 확실하게 조사, 보고 된 바는 없다. 하지만 구석기 시대의 유물을 통해 오랜 옛날 부터 가죽을 사용해 왔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때의 가죽은 가공처리를 한 오늘날의 가죽과는 거리가 멀다. 동물을 먹고 남은 가죽을 건조시켜 사용 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오늘날의 모피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삼한시대가 되면 가죽을 가공한 흔적이 보이는데, 견피 등을 명반으로 가공처리해 사용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 선조들도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가죽 가공, 즉 제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양한 가죽 제품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말안장, 칼집 증의 군수품은 물론이고 신발, 모자, 의료 등의 생활용품에도 가죽이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죽은 여전히 귀했다. 희소성으로 인해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애용되었으며, 자색으로 염색된 가죽은 왕만이 쓸 수 있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는 피전(皮典)을 두어 국가 차원에서 관리할 정도로 가죽을 귀하게 여겼다.

삼국 통일 후에는 가죽을 생계수단으로 삼은 나라가 등장한다! 바로 후삼국 시대의 발해! 발해의 특산품으로는 사슴, 토끼, 돼지, 말 등의 모피류가 유명했다고 한다. 중국으로 수출을 할 정도였으니 가죽이 발해의 효자상품 노릇을 톡톡해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의 갑옷, 철사슬 위에 가죽 조각을 붙인 형태 하지만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가죽 산업이 쇠퇴하게 된다. 고려시대의 국교인 불교는 살생을 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죽을 중국에서 수입해 왔다고 한다. 가죽을 수출하기도 했던 나라인데... 반대로 수입할 정도로 쇠퇴해버리다니. 가죽과 관련된 일을 하는 빼콩이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살수대첩과 귀주대첩 모두 둑을 막았다 터트려 적을 물리친 전투라고 생각하는 것, 하지만 역사서 어디에서도 살수대첩과 귀주대첩 모두 둑을 막았다가 터트려 수공을 펼친 전쟁이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히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나 방송(특히 드라마)이나 소설에서 보면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은 둑을 막아 터트려 승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단지 강감찬 장군이 홍화진 전투에서 쇠가죽을 엮어 수공을 펼친 기록은 있다. 우리가 이 홍화진 전투를 착각해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을 혼동하고 있다.

살수 대첩[편집 | 원본 편집]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다.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을지문덕 장군은 지혜를 발휘해 굵은 밧줄 엮은 소가죽으로 강물을 막는다!

그리고 수나라군이 강을 건널 때 댐을 터트려 100만 대군을 물리치게 된다. 이 살수대첩의 일화를 통해 삼국시대에도 가죽의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문술은 군사가 피곤하고 기운이 다해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견고하고 금방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문덕의 말에 따라 방진 만들어 떠났다.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에서 공격하니 우문술 등은 싸우며 후퇴하여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은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그들은 후군을 쳐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이에 적군이 무너져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 요수를 건널 때에는 9군이 30만 5000명이었는데 요동으로 후퇴했을 때는 2천700명 뿐이었다.

귀주 대첩[편집 | 원본 편집]

후에, 송나라와 거란은 많은 대립이 있었지만, 거란의 황제 성종은 송나라를 완전히 굴복시켰고 송나라는 거란의 속국이 되었다. 송나라를 정복하고 남쪽이 안정되자 거란은 다시 고려를 넘보기 시작했고, 1010년 11월 고려와 거란의 2차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고 1011년 1월 1일 개경을 함락시키게 된다.

이미 나주로 피난한 현종이 직접 거란에 들어와 조공을 한다는 약속을 할 때 까지 참혹한 약탈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인질을 포로로 끌고가던 중 이미 정복되었던 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퇴각하는 거란군은 무수한 피해를 입은 뒤에 압록강을 다시 건널 수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전쟁에서도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거란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 간의 전투에서 얻은 고려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격파할 비책을 숨긴 채 1018년 고려와 거란의 최후의 전쟁을 감행했다.

거란은 현지조달을 통한 속전속결로 개경을 점령한 뒤 고려의 국왕을 잡는 <개경직공>을 계획 하였고, 고려에게 선전 포고를 한 거란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을 감행했다. 당시 상원수로 임명되어 전쟁의 총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강감찬 장군은 기병 1만 2천여명을 뽑아 흥화진성 동쪽 삼교천에 매복시켰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 병력을 배치한 강감찬의 장군은 거란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고, 내원성에 집결한 거란족은 흥화진성을 공격하지 않고 강감찬 장군이 매복하고 있는 삼교천으로 기동하였다. 거란군들이 강을 도하하고 있을 때, 강감찬 장군은 성 동쪽의 큰 강을 소가죽을 엮어 막은 것을 터트렸고, 갑작스런 공격으로 흐트러진 거란군을 공격하였다. 거란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모든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란의 사령관 소배압은 곧 바로 병력을 수습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강감찬은 김종현이 이끄는 부대와 강민첨이 이끄는 부대로 나뉘어 개경에 배치하고 거란군의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추격하도록 하였다. 거란군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지만 결국 개경에 인접한 금교역에 도달하였다. 2차 전쟁때만 해도 개경을 내주었던 현종은 이번엔 개경의 성문을 닫고 사수를 결심하였고 1019년 1월 금교역에서 거란군 척후대는 전멸하고 만다. 전의를 상실한 거란군은 개경 공격을 결정하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고려군의 추격으로 거란군은 귀주로 몰리게 되었다. 그 때 강감찬 장군은 주력군을 귀주 벌판에 배치를 하고 있었고, 예상하고 있었던 기상의 변화와 김종현 부대의 합공으로 결국 거란군을 굴복시키며 27년간의 기나긴 최종의 전투는 끝이 나게 되었다

귀주대첩 당시 갑자기 불어닥쳤던 남풍은 온전히 서서 적을 응시하기 조차 힘들 정도의 센 강품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계절적인 기압골의 이동과 활강형 한랭전선, 초속 20m/s 을 예측한 강감찬장군의 예리함과 동물행동의 변화나 바람방향의 변화등을 오랜시간동안 지켜본 강감찬 장군의 지혜로움이 전투에서 크게 영향을 준 전쟁인 것 같다.

강감찬장군이 무신이 아니라 문신출신인것에 또한번 놀랐고 뛰어난 관찰력과 예리함, 그리고 지혜로움으로 27년간의 긴 전쟁의 막을 내리게하고 전쟁후 독자적 세력이 되도록 고려에 큰 공헌을 한 강감찬장군의 존경심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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