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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Saladin(Salah al-Din Yusuf Ibn Ayyub), 1137/38~1193.3.4]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재위 1169~1193)다. 십자군과 무슬림들간의 전사에 " 살라딘 " 이라는 영웅의 이름이 반드시 나타난다.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아랍어: 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 쿠르드어: سه‌لاحه ‌دينێ ئه ‌يووبى, 페르시아어: صلاح الدین ایوبی, 터키어: Selahaddin Eyyubi) 또는 살라딘 (1138년경 - 1193년 3월 4일)은 12세기경 티크리트(현재 이라크 북부)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쿠르드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누레딘 왕조를 섬겼고, 1169년경 파티마 왕조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1171년 파티마 왕조를 넘어뜨린 뒤 시리아 정복에 나서고,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집트에 군사적 봉건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국가가 공인한 종교를 시아파(派)로부터 수니파[正統派]로 바꾸어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또한 십자군전쟁을 수행하여 제3회 십자군의 리처드 1세와 휴전협정을 맺어,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에서 권력을 확보하였다.

3차 십자군 원정에 맞서서 이슬람을 이끌었다. 전성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서양에서는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본명은 유수프(Yousuf) 였다. 그는 그의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게 알려졌으며, 십자군과 맞서 전쟁을 치를 당시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의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살라흐 앗딘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한다.

이슬람의 술탄[]

이집트·시리아·예멘·팔레스타인을 통치했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했다. 가장 유명한 이슬람의 영웅이기도 하다. 대(對)십자군전쟁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해(1187. 10. 2) 88년간의 프랑크족에 의한 점령통치를 끝냈다. 살라흐의 군사전략은 제3차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그리스도교 측의 대반격을 곤경에 빠뜨렸다.

살라흐는 쿠르드족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 그의 아버지 나즘 앗 딘 아이유브는 가족을 데리고 알레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북부 시리아의 강력한 투르크 총독, 이마드 앗 딘 장기 이븐 아크 손쿠르 군대에 입대했다. 발베크와 다마스쿠스에서 성장하는 동안 살라흐는 군사훈련보다는 종교공부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진 평범한 청년이었던 듯하다.

그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가 장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미르 누레딘 휘하에서 중요 군사지휘관으로 있던 그의 삼촌인 아사드 앗 딘 시르쿠의 참모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제1차 십자군이 세운 라틴-그리스도교계(프랑크족) 번국(藩國)들에 이집트가 패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르쿠가 군대를 이끌고 3번에 걸쳐 이집트로 원정하는 동안 이집트에서는 예루살렘의 라틴계 왕인 아말릭 1세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유력한 대신인 샤와르, 그리고 시르쿠 3자(者) 사이에 복잡한 투쟁이 진행되었다. 시르쿠가 죽고 샤와르가 암살당한 뒤 살라딘은 1169년 31세의 나이로 시리아 군사령관과 이집트의 와지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가 비교적 빨리 권력의 자리에 부상한 것은 쿠르드족의 동족등용 관습은 물론 그 자신의 두드러진 재능 때문이었다. 살라흐는 일반적으로 술탄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이집트의 와지르로서 실제로 왕(malik)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 었다.

1171년 살라흐가 시아파 파티마 칼리프 왕조를 폐지하고 이집트의 수니파 복귀를 선언하여, 결국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으로써 그의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한동안 누레딘의 봉신(封臣)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러한 관계는 1174년에 누레딘이 죽으면서 끝이 났다. 이집트의 방대한 농경지를 재정 기반으로 삼아 살라흐는 소규모이지만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와서 누레딘의 어린 아들을 대신하는 섭정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곧 이러한 요구를 포기하고 1174~86년 살라흐는 자신의 기치하에 시리아, 북부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모든 이슬람교도 영토의 통합을 열심히 추진했다. 그는 능란한 외교술을 구사하고 필요시에는 기민하고 결단력 있게 군사력을 사용하여 그 과업을 완수했다. 허례와 방탕과 잔인성은 찾아볼 수 없고 아량 있고 도덕적이면서도 확고한 통치자로서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갔다. 그때까지 이슬람교도들이 상호간의 심각한 불화와 격심한 경쟁 때문에 십자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살라흐의 일관된 목적의식 아래 이슬람교도들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재무장되었다.

살라흐의 모든 행동은 '성전'(jihād:그리스도교도들의 십자군에 상응하는 이슬람교도의 싸움)이라는 사상에 대한 강렬하고 확고한 헌신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지하드). 이슬람 종교제도의 증가와 전파를 장려한 것은 그의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살라흐는 학자와 설교자들을 널리 불러모았고 그들이 활동할 대학들과 사원들을 설립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성전'을 선양하는 작품을 쓰도록 의뢰했다. 그의 생활방식의 진면목이었던 도덕적 쇄신을 통해 살라흐는 그의 통치영역 내에서 5세기 전 최초의 이슬람 세대들이 당시 세계의 절반을 정복할 때 아주 소중하게 경험했던 열의와 감격을 어느 정도 재창출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살라흐는 새롭고 개선된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는 제멋대로인 많은 군사를 통일시키고 훈련시킴으로써 군사적 세력균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1187년 라틴 십자군 왕국들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전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었을 때 살라흐의 군대는 십자군에 뒤지지 않았다. 1187년 7월 4일 살라흐의 탁월한 군사적 감각과 십자군측의 무감각 덕분에 그는 팔레스타인 북부 티베리아스 부근의 하틴에서 지치고 갈증나 괴로워하는 십자군을 함정에 빠뜨려 일격에 궤멸시켰다(→ 하틴 전투).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입은 십자군의 타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이슬람 군대는 신속하게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전지역을 공략할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아크레·토론·베이루트·시돈·나자렛·카이사레아·나불루스·자파(야포)·아스칼론(아슈켈론) 등지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살라흐의 더없는 위업이면서 동시에 십자군운동 전체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은 1187년 10월 2일로, 이때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성지인 예루살렘은 88년 동안의 프랑크족에 의한 점령통치를 끝내고 술탄의 군대 앞에 항복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도시를 정복할 당시의 유혈이 낭자했던 주민에 대한 대학살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이슬람교도의 재탈환은 살라흐와 그 군대의 교양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빛이 났다.

1189년 당시 십자군은 단지 3개 도시만을 점령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라흐의 급격한 승세는 티레에 대한 공략전에서 실패하여 무색해졌다. 티레는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 남은 그리스도교도들이 모여든 거의 난공불락의 해안 요새였다. 이곳은 라틴인들의 반격 집결지가 되었다. 아마도 살라흐는 자기의 예루살렘 탈환에 유럽인들이 다시 반격해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예루살렘 함락은 유럽에 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으며, 유럽은 새로이 십자군을 일으켜 대응했다. 많은 고위 귀족들 및 유명한 기사들과 아울러 이번의 제3차 십자군에서는 세 나라의 국왕이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스도교 진영이 쏟는 노력의 양과 그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남긴 인상은 기사도적이고 위풍당당한 적으로서의 살라흐 이름 위에 살라흐가 이룬 군사적 승리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광을 덧붙여주었다.

십자군 원정은 오랫동안 소모적으로 계속되었으며,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때로는 충동적이었지만 분명히 천재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위로 끝났다. 여기에 살라흐의 흔히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위대한 업적이 있다. 지치고 의욕 없는 봉건제하의 징집병을 데리고 1년 중 단지 한정된 계절에만 싸울 수 있는 실정에서 살라흐는 불굴의 의지로 그리스도계의 뛰어난 전사들을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십자군은 레반트 해안에 마련된 불완전한 교두보에서 거의 전진하지 못했고 리처드 왕이 1192년 10월에 동양을 떠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살라흐는 자신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다. 오랜 전쟁 동안 끝없이 마상에서 지낸 생활이 그의 건강을 해친 때문인지 곧 죽었다. 그의 친척들이 벌써 그의 제국의 토막들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동안 그의 친구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고 가장 관대했던 통치자가 자신의 무덤을 만들 돈마저도 충분히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생애[]

성장[]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발베크의 영주였다. 다마스쿠스에 머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딘의 법원에서 수니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흐 앗딘은 그의 삼촌인 시르쿠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160년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끝에 승리하여 1169년 삼촌 시르쿠가 장관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가 통치하는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 왕가의 혼란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행운[]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흐 앗딘은 이름뿐인 칼리프 알 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흐 앗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누르 앗딘이 죽기 전까지 살라흐 앗딘은 가급적 군사행동을 피했지만 이내 십자군과의 대대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

십자군과의 전쟁[]

1170년과 1172년 살라흐 앗딘은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누르 앗딘 사후 그의 직위는 아직 소년이었던 살리흐 이스마엘 알 말리크에게 계승되었지만 이 소년 역시 1181년 사망하였다. 누르 앗딘 사후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였으며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누르 앗딘이 통치한 다른 두 대도시 알레포와 모술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라흐 앗딘은 이 도시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1176년과 1186년 이들 도시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Hashshashins)이라는 정예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십자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도 늘상 승리하였다. 단 한번,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흐 앗딘은 패배를 기록하였는데,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과 맞닥뜨린 살라흐 앗딘은 대패하여 병력의 9할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178년 살라흐 앗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살라흐 앗딘은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대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은 살라흐 앗딘을 자극하였고, 특히 사티용의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해댔다. 이어서 레날드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고, 살라흐 앗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1187년 7월 살라흐 앗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흐 앗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흐 앗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는데, 유럽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레날드가 상단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살라흐 앗딘의 누이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하지만 무슬림측의 기록에는 없는 부분이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누이가 없었으며, 그를 따르는 여자 무슬림이 있었다고 전할 뿐이다. 뤼지냥의 기 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흐 앗딘은 그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하틴 전투가 있은 지 이틀 후 살라흐 앗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흐 앗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흐 앗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살라흐 앗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흐 앗딘은 바이트 알 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때 700 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흐 앗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접수한 살라흐 앗딘은 본래 협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은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흐 앗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프랑크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흐 앗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티레(Tyre)였다. 티레의 십자군을 지휘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수비를 강화하고 살라흐 앗딘의 두 차례에 걸친 공성을 막아냈다. 1188년 살라흐 앗딘은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를 그의 아내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다. 기와 시빌라는 티레로 입성하여 피난민들을 찾고자 하였지만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코라도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기는 아크레에 대하여 공성을 단행하였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하였으며,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8월 28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포로로 잡은 모든 프랑크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보복하였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전위부대가 잡아온 프랑크인 포로를 살라흐 앗딘이 목을 베어 처형하자 병사들이 남은 몸통을 난자해 복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1191년 9월 7일 살라흐 앗딘의 군대는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려 아르수프 전투를 벌였다. 비록 살라흐 앗딘은 리처드와 싸워 패배하였지만 두 왕은 내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기품있는 일화들을 낳았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흐 앗딘은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중에 말을 잃자 살라흐 앗딘은 두 필의 말을 보내 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흐 앗딘은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흐 앗딘의 동생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것이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 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망[]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한지 오래 지나지 않은 1193년 3월 4일,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살라흐 앗딘의 금고를 열어본 사람들은 그의 재산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의 수준임을 보고 놀랐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현재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복서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을 기증하였지만 살라흐 앗딘의 시신은 아직도 석관 옆 목재로 만든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흐 앗딘은 유럽에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 또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월터 스코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저작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살라흐 앗딘은 특히 리처드 1세의 존경을 샀는데, 리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을 위대한 왕으로 평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살라흐 앗딘과 리처드 1세는 많은 선물을 교환하며 지냈지만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살라흐 앗딘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1191년 4월에 발생한 바 있다. 프랑크족 여인의 3달 된 아기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리자 프랑크인들은 이 여인에게 살라흐 앗딘에게 자비를 구할 것을 권하였고, 사연을 전해들은 살라흐 앗딘은 사재를 모아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살라흐 앗딘에 의하여 건축된 구조물들이 일부 현재까지 남아있다. 1175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에 쌓은 성채가 그러하며,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특히 그가 산 정상에 구축한 콸랏 알 긴디(Qalaat Al-Gindi) 요새는 상단의 통행로를 잘 관측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로 만들어진 큰 방들과 상점, 수도시설이 포함되어 있다.

연표[]

1138년 - 티크리트의 쿠르드족 족장 아이유브의 아들로 태어나다

1152년 - 시리아의 군주 누르 앗딘의 군대에 들어가다

1164년 - 십자군과 첫 대면하고 세번에 걸친 이집트 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다

1169년 - 삼촌 시르쿠의 부장으로 활약하고 이집트로 건너가다

1171년 - 파티마 왕조의 군주를 타도하고 이집트를 압바스 왕조에 통합하다

1174년 -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세력을 확대하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다

1183년 - 알레포 점령

1186년 - 모술 점령

1187년 - 성도 예루살렘을 정복하다

1189년 - 1191년 - 아크레 공방전, 결국 아크레 함락하다

1192년 - 사자심왕 리처드와 평화협상을 맺다

1194년 - 짧은 투병 기간을 거쳐 다마스쿠스에서 영면하다. /위키백과

1187.10.2 - 이슬람의 살라딘(Saladin),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함락[]

또한 살라흐는 새롭고 개선된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는 제멋대로인 많은 군사를 통일시키고 훈련시킴으로써 군사적 세력균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1187년 라틴 십자군 왕국들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전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었을 때 살라흐의 군대는 십자군에 뒤지지 않았다. 1187년 7월 4일 살라흐의 탁월한 군사적 감각과 십자군측의 무감각 덕분에 그는 팔레스타인 북부 티베리아스 부근의 하틴에서 지치고 갈증나 괴로워하는 십자군을 함정에 빠뜨려 일격에 궤멸시켰다(→ 하틴 전투).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입은 십자군의 타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이슬람 군대는 신속하게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전지역을 공략할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아크레·토론·베이루트·시돈·나자렛·카이사레아·나불루스·자파(야포)·아스칼론(아슈켈론) 등지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살라흐의 더없는 위업이면서 동시에 십자군운동 전체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은 1187년 10월 2일로, 이때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성지인 예루살렘은 88년 동안의 프랑크족에 의한 점령통치를 끝내고 술탄의 군대 앞에 항복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도시를 정복할 당시의 유혈이 낭자했던 주민에 대한 대학살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이슬람교도의 재탈환은 살라흐와 그 군대의 교양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빛이 났다.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브리태니커

1187.7.4 - 이슬람의 살라딘(살라흐 앗 딘, Saladin), 하틴전투 승리[]

유대교ㆍ이슬람교ㆍ그리스도교 모두가 성지로 여겨온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이슬람군이 1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뒤인 1099년 7월이었다.

이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의 영토가 된 것은 불세출의 영웅 살라딘이 등장하고 부터였다. 쿠르드족이었던 살라딘은 종족과 종파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군주였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늘 눈엣가시였다.

1187년 7월4일, 1만5000명의 그리스도교군과 1만8000명의 이슬람군이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에 위치한 하틴에서 맞붙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초전, 그리스도교군은 참패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위치한 유럽인들의 영토로 쳐들어가 10월2일, 88년간 유럽인들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살라딘은 이때도 관대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예루살렘의 왕을 풀어줬고 성안에서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공격을 하루 늦출 정도였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760여년간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99년에 미 타임지는 ‘지난 1000년 세기의 인물’을 선정하면서 살라딘을 12세기의 인물로 당당히 올렸다

틀:십자군 중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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