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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申師任堂,1504(연산군 10)~1551(명종 6)]은 조선 중기의 예술가이다. 그녀의 남편은 이원수 공이다. 사임당의 아버지는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이름은 명화(命和), 자는 계흠(季欽), 호는 송정(松亭)이었고, 멀리 고려 태조의 충신이었던 신숭겸의 18세 손이었다.

신사임당은 효녀로서, 착한 아내로서, 그리고 어진 어머니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분명히 하나의 훌륭한 인격자요, 학문인이요, 시인이요, 서화에 능한 천재적인 예술가였다.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로 칭송된다. 본관은 평산.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이이는 〈행장기〉를 지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순효한 성품 등을 기록했다. 사임당이 탄생한 해는 연산군 10년이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이래 연산군의 악정은 날로 심해졌고 각 도에 채홍사·채미사 등을 파견시켜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하고, 성균관 학생들을 축출하여 유락장으로 만들며, 사간원을 폐하고 홍문관을 파하는 등 사치와 학정이 온 누리를 짓누르고 있던 시기였다.

사임당의 부친은 이 혼란한 시기에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아버지 신명화공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는 아들은 한 분도 없고 따님만 다섯 분인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로 태어난 분이다.

사임당은 7살 때부터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산수화를 앞에 놓고 늘 그것을 모방해서 그림을 연습하였다. 한편, 부모님에게 유교 경전과 한문학을 배워 당시 여자가 갖추어야할 근본 교양과 작품을 길러서 장차 어진 부인이 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당호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강릉 외가에서 자랐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혼인했다. 이원수는 본관이 덕수(德水)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홍씨 밑에서 자랐으며, 처음 이름은 난수(蘭秀)요, 자는 덕형(德亨)이었다. 그뒤 친정에 머물다가 38세에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포도·묵죽·묵매·초충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렸다. 산수에서는 안견파 화풍과 강희안 이래의 절파 화풍을 절충한 화풍으로,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산수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월하고주도 月下孤舟圖〉에서 산들은 나지막하고 옆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수면을 따라 전개되는 공간은 막힘이 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작품의 구도나 공간처리 등은 안견파의 것을 확산시킨 듯하지만, 필묵법이나 준법은 절파 계통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초충도 草蟲圖〉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한 필치와 미려한 설채법을 구사했다. 8폭의 〈초충도〉 중에서 '가지'를 살펴보면, 화폭의 중앙에 곡선진 가지의 두 줄기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섬약한 줄기들에는 밤색과 흰색의 가지들이 곱게 열려 있다. 가지 주변에는 종류가 다른 화초와 곤충들이 배열되어 있어 그림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안정된 구도, 몰골법(沒骨法)으로만 이루어진 묘사, 아담하고 음영을 살린 설채법 등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보여준다. 이밖의 주요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노안도 蘆雁圖〉·〈연로도 蓮鷺圖〉·〈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 등이 있다. 사임당의 화풍은 넷째 아들인 우(瑀)와 맏딸인 매창(梅窓) 이부인(李夫人)에게 전해졌다. 글씨는 초서 6폭과 해서 1폭이 남아 있다. 1868년 강릉부사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했다.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과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가 유명하다.

신사임당을 가부장 사회(家父長 社會)를 거부한 여권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지 모른다.

사임당은 슬하에 4남 3녀를 둔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남편 이원수는 6세 때부터 부친을 여의고 독자로 자랐기 때문에 유학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학문에 깊이 들어갈 형편이 못 되었다. 그리하여 결혼 후 부인 사임당에게 학문을 듣고 깨달음이 많았다. 사임당이 21세 되던 9월에 맏아들 선(璿)을 낳았고, 26세 때 맏딸 매창(梅窓)을, 이어서 둘째 아들 번( )을, 그리고 둘째 딸을 낳았고, 사임당이 33세 때인 중종 31년(1536)에 유학의 대가인 셋째 아들 이(珥)를 낳았다. 그리고 셋째 딸에 이어 넷째 아들 우(瑀)를 낳아 이로써 4남 3녀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사임당은 율곡과 같은 대학자를 낳기도 했지만 큰딸 매창과 넷째 아들 옥산 우는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을 그대로 타고났다. 매창은 학식·인격·지혜·시·글에서 뿐만 아니라 여자가 갖추어야 할 온갖 것을 사임당에게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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