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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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불화는 7살 때 아주 우연한 기회로 거세되어 원 황실의 환관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에게는 황실에서 물을 따르고 바닥 청소를 하는 잡역이 맡겨졌다. 당시 박불화와 함께 입궁했던 기락이란 소녀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서로 믿고 돌봐주는 친구로 지내며 힘든 황궁생활을 버텼다. 한편 원 문종의 아들 토곤 테무르는 놀다가 외모가 뛰어났던 기락을 발견하고, 그를 자신의 처소로 데려간다. 얼마 후 문종이 죽고 토곤 테무르는 원순제로 황제에 등극한다.

기락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우 똑똑하고 영민해 순제가 상당히 총애하였다고 한다. 순제의 제1황후 다나슈리는 그를 매우 질투해 자신의 지위를 이용, 끊임없이 기락을 괴롭혔다. 심지어는 기락에게 채찍질을 해 온 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335년 다나슈리 하툰의 형제들이 모반을 일으키고, 다나슈리는 독살당한다. 황후가 죽자 순제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기락을 새 황후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에 부딪혀 대신 바얀 후투그를 황후에 봉한다.

그러나 순제는 오직 기락만을 총애하고, 황후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락은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아 황제의 더 큰 사랑을 얻고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한다. 이 사건으로 기락은 마침내 제2황후에 책봉되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기황후이다. 1365년 제1황후 바얀 후투그가 향년 42세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후, 기황후는 정황후가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오른다.

기황후는 황후가 된 후에도 박불화를 잊지 않고 자신이 기거하는 흥성궁에 가까이 두었으며, 그를 영록대부로 승급시키고 자정원사의 직책까지 맡게 하였다. 자정원은 원나라 때 전문적으로 전국의 재정을 관리하던 부문으로, 쉽게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던 요직이었다. 기황후로부터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은 박불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많은 재물을 축적했으며, 그 중 상당 부분은 기황후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박불화는 재산을 모으는 데 매우 조심스럽고 치밀해서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박불화는 자신이 축적한 재물로 종종 조정 신료들과 황제의 종친들에게 뇌물을 주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칭찬하기만 했다. 한편, 재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된 기황후와 박불화는 황제의 권력을 넘보게 된다.

순제가 여색에만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는 동안, 기황후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힐 계획을 세운다. 박불화는 기황후를 도와 쿠데타를 계획한다. 그는 좌승상을 계획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수포로 돌아가자, 기황후, 황태자와 함께 좌승상을 축출하고 대신 삭사감과 함께 쿠데타를 모의한다.

당시는 천하가 어지럽고 원 왕조도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순제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고, 안팎의 대신들도 점점 박불화 세력으로 기울어진다. 어사대부 노적사 등 일부 황제파는 박불화 축출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파직당한다. 어사 이국봉 역시 충심으로 박불화의 간악함을 고하고 황제와 황태자를 설득했으나 황제는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직위만 강등당했다. 박불화는 적대 세력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입지를 계속 굳혀가며 득의양양했다.

박불화는 황제에게 원의 장수 불로드 티무르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해 그의 지위와 병권을 박탈시킨다. 화가 난 불로드 티무르가 자신의 사병들을 앞세워 황명을 거부하자, 겁을 먹은 순제는 하는 수 없이 불로드 티무르의 직위를 복권하고, 박불화는 황제를 미혹시켰다는 죄명을 달아 간쑤로 유배시키겠다고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이는 명분상의 핑계에 지나지 않아 박불화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 채 베이징에 계속 머물렀다.

이 사실에 더욱 화가 난 불로드 티무르는 아예 군대를 베이징으로 진격시킨다. 박불화를 내놓지 않으면 군대를 철수할 수 없다는 주장에 순제는 할 수 없이 굴복하고, 박불화는 원한을 산 불로드 티무르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원장이 원을 멸망시키고 명의 황제로 등극한다. 원 멸망 이후 기황후의 행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박불화가 고려인이 아니라 몽고인이라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사료에는 박불화가 기락과 함께 입궁하였다고 적혀있으나, 이 사실이 곧 박불화가 고려인이라는 증거로는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박불화라는 이름 역시 몽고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원나라는 민족에 따른 차별분화정책을 시행하여 제 1등은 몽고인, 제 2등은 색목인, 제 3등은 한인, 제 4등은 남인 등으로 민족에 따라 계급을 나누었다. 당시 모든 민족은 이 정책에 따라 각기 다른 지위와 권리가 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여성의 경우에는 민족에 상관없이 후비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태감의 경우는 몽고인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황후의 지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자정원 같은 중요 관직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또한 계급이 낮은 고려인이 자정원 관리가 되는 일에 대해서도 조정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박불화가 몽고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박불화가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외국인 환관임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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