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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스투파 초기불교의 ‘무불상(無佛像)시대’는 스투파-탑(塔, 塔婆) 자체가 불상을 대신 했기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탑의 최초의 형태는 사발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반구형(半球形)의 소박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불교에 전파에 따라 경쟁적으로 복잡해지고 거대해지며 불교의 동점(東漸)에 따라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더욱 변화하면서 지금의 전, 목, 석탑(塼,木,石塔) 같은 여러 형태로 변해왔다. 이렇게 변천된 스투파의 변천사의 정점에 바로 싼치가 있다. 아니 싼치로부터 스투파는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전 세계의 모든 불탑- 우리의 다보탑, 석가탑의 고향도 결국은 이곳인 셈이다.

스투파가 자리 잡은 유적지군은 싼치역에서 지호지간이었다. 정면으로 뻗은 길을 따라 곧장 가다 보면 나직한 산언덕이 보이고, 그 중간에 왼편으로 아쇼카 석주의 ‘사자상(獅子像)’ 머리가 보존되고 있는 박물관이 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먼발치에 스투파군의 둥근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덕 위는 생각보다 넓었는데 그곳에 산치유적군은 넓게 퍼져 있고 그 한 가운데 흔히 ‘산치대탑’이라 부르는 ‘마하스투파’는 마치 사발을 뒤집어 덮어놓은 모양으로 그렇게 작은 동산처럼 솟아 있다. 하늘로 향해 뾰족하게 치솟는 형상의 다단형(多段型)의 탑만 눈에 익은 우리들에게는 약간 낮선 모양이지만 한눈에도 정제되고 단순화된 아름다움은 범상치 않았다. 아니 아름다움이나 뭐 그런 것을 넘어 어떤 장중한 에너지를 안으로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스투파의 전체적인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여 전체적으로는 일반적인 탑의 기본 구조- 기단(基壇), 탑신(塔身), 상륜부(相輪部)-로 이루어진 것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스투파의 몸체와 부속 장엄물은 모두 붉은 색을 띄는 사암(砂巖)으로 만들어졌는데 몸체는 둥근 기단(基壇)위에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반원형의 봉분(封墳)처럼 올려 쌓았고 그리고 그 위로는 이를 치장하는 둥근 합(盒)뚜껑 모양의 윤보(輪寶)가 여러 층 무쇠 기둥인 찰주(刹柱)에 꽂혀 있고 다시 이 윤보를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네모로 둘러쳐져 있다.

마치 동산 같은 스투파 몸체 둘레로 역시 같은 재료로 돌난간을 둘렀는데 이 돌난간과 봉분 기단 사이에는 큰 바닥재 돌을 깔아 대탑을 돌 수 있게 하는 안쪽 순례로(巡禮路)를 만들었고 다시 봉분을 돌아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봉분의 중간에서 다시 탑과 산치유적지 전체를 바라보며 탑을 돌 수 있게 위쪽 순례로를 하나 더 만들었다. 그러니까 일반 순례자도 대탑위로 올라가 대탑을 한바퀴 돌 수 있는 구조였다. 대탑의 높이가 36m이니 그 위에서 탑을 한바퀴 돌면서 바라보는 전망은 가히 절경일밖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하 스투파를 이채롭게 하는 것은 울타리와 그 사이로 정확한 방위에 따라 배치되어 있는 4개의 대문-‘토라나’였는데 이 문들은 모두 ‘스와스티카(Swastika, 卍字)’를 구조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산치 스투파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구조일 것이지만, 우리의 탑과는 여러 방면으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기단이 사각형이 아니라 원형이라는 점, 거대한 반구형의 복발(覆鉢)이 우리와 같은 사각형 비신(碑身)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울타리 사이로 대문을 설치하여 성과 속·피안과 차안·현실과 열반으로 상징되는 다른 두 세상을 구별하였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이론적인 스투파의 모양새보다도 티베트에 심취해 있다고 자부하는 내 눈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이 스투파가 바로 인도나 티베트에서 주로 행하는 성지를 도는 순례행위, 즉 ‘꼬라(Kora)'를 할 수 있게 처음부터 설계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탑에는 ’3개의 순례로’가 있는데, 그 첫째는 봉분 중간까지 사람이 올라가 스투파를 돌며 원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한 ‘윗길’과 원형 울타리 안으로 난 ‘내부길’ 그리고 바깥에서 스투파 전체를 돌 수 있게 만든 ‘외부길’이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성지의 안쪽을 빙빙 도는 ’낭꼬라‘와 중간의 ‘파꼬라‘ 그리고 바깥을 도는 ’링꼬라‘의 3종류가 있는데 이 원조 스투파는 바로 이런 원리를 구현시킨 것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탑돌이‘의 예와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탑의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빙글빙글 도는 우리의 탑돌이는 인도나 티베트식으로 본다면 바깥을 도는 ’링꼬라‘에 해당되는데, 우리에게는 나머지 두 가지 돌이형식을 행할, 2~3개의 ’돌이-길‘을 가진 큰 탑이 현재는 남아 있지 않기에 우리의 돌이의 관습은 바깥돌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스투파의 전파과정에서 탑 자체가 변형 내지 간소화되면서 돌이를 할 길 자체가 설계단계에서 사라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가설에 의하면 수미산은 티베트 고원에 솟아 있는 카일라스산(Kailas)을 모델로 하여 이론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우주적인 산은 인도인들이 성스럽게 인식하는 생명수인 갠지스의 발원지이며 또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한편 사랑하는 쉬바신의 거처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산을 한바퀴 도는 행위만으로 이승에서의 모든 까르마(Karma)가 소멸된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 강의 하류인 갠지스에서 목욕하는 공덕도 마찬가지라는 논리이지만

인도인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망은 갠지스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카일라스에 갈 수 없기에 차선책으로 하는 것이지, 가능하다면 그들은 그 성스러운 산의 발밑에 엎드려 경배하고 산을 한바퀴 돌고 그리고 산 아래에 있는 마나스(Manas) 호수에서 성욕(聖浴)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갠지스에서의 목욕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적어도 2천년 훨씬 전에, 이 점을 착안한 한 천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수미산- 카일라스를 닮은 스투파를 만들어 그 속에 불사리를 넣어 보자는 것이었다. 두, 세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자는 생각이었다. 안팎으로 돌이를 하면서 예배도 드리자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마도 그렇게 해서 스투파의 사발형 몸체 안에는 불사리를 봉안하고 또한 스투파를 돌 수 있게 3겹의 ‘탑돌이-길’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것이다.” 란 말은 물론 나의 개인적인 가설을 의미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산치대탑의 가운데 복발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카일라스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카일라스나 산치 스투파를 빙빙 도는 위의 3가지 꼬라는 현재도 인도나 티베트에서 똑같이 행해지고 있다는 점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원 마당에 수미산 대신에 석탑을 세워놓고 그 것을 향해 예배하고 때때로 ‘탑돌이’를 하는 행위와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수미산-카일라스 대신 닮은 모양인 산치스투파로, 다시 더 작은 다른 스투파로 변화되면서 스투파는 동서남북으로 점차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마하스투파가 세계적인 이유는 물론 기원전의 작품이라는 시간적 희소가치가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 외에도 돌 위에 새겨진 조각품의 예술적 격조도 큰 몫을 한다는 점은 재삼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울타리 사이로 난, 두 기둥과 대들보(?)로 이루어진 4개의 ‘토라나’에 새겨져 있는 조각들이 가히 일품인데 그 중에서 북문이 가장 뛰어나다. 원숭이로부터 꿀을 공양 받는 그 유명한 장면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과 동물들이 가득 차 있는 그것들은 2천년이란 유구한 세월을 뛰어넘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직도 생생하다. 예를 들면 붉은 빛이 감도는 돌 위에 래리프(lelief)- ‘돋을새김’ 기법으로 새겨진 천녀 야시카(Yakshika)의 자태는 그대로 윤기 있는 피부를 가진 풍만하고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 그 자체이다. 돌이란 재료를 마치 밀가루 반죽 주무르다시피 한 석공예 기술도 물론 신기(神技)에 가깝거니와 일관된 주제의식을 제한된 면적을 마치 무한대의 공간처럼 활용하여 짜임새 있게 배치한 구도는 정말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게 만든다. 가히 ‘극치’란 단어가 저절로 튀어나오게 하였다.

돌 위에 새겨진 내용들은 이른바 ‘팔상도(八相圖)’라는 형식의 붓다의 일대기를 의미 있는 사건별로 정리한 것과 역시 붓다의 과거 일곱 번에 걸친 자타카(Jataka)- 전생도가 주된 주제를 이루고 있다. 다만 불상을 만들지 말라고 유촉하신 붓다의 유언이 지켜지던 초기 무불상시대를 상징하는 내용들- 연꽃·보리수·법륜·족적·스투파 등이 붓다의 존재와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어서 시기별, 내용별로 그리스풍의 영향을 받는 간다라시대 이후로 구분되는 유불상(有佛像)시대와 큰 차이를 이루고 있다.

아쇼카 석주는 근처 어딘가에 있는 줄로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그것이 보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지점은 정확하게 마하 스투파의 남문 바로 앞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석주의 밑기둥과 동강이 나 쓰러져 있는, 두 아름 정도 굵기의 돌기둥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세워져 있을 당시의 위용을 그려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원래 그 위에서 사해를 바라보며 포효하던 사자상(獅子像)부분은 현재 언덕 아래의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산치의 유적군은 원래 아쇼카가 붓다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시작하여 그 후 증축되면서 모두 8기의 스투파와 45개의 사원과 신전이 세워졌다는데 현존하는 것은 모두 3기의 스투파와 부서진 석주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널려 있는 사원 터가 전부였다. 그 유지들은 벽돌로 된 기단부만 남은 것이 대부분이고 간혹 건물의 반쯤이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어느 것이고 그것을 둘러보는 나그네의 가슴에 한줄기 소슬한 바람을 스치게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언덕 입구 초입에 있는 ‘제3호 스투파’는 규모는 좀 작지만 사리푸트라 와 모드갈야나의 사리를 안치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탑문의 품격은 마하 스투파의 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싼치역이 있는 방향에 있는, ‘제2호 스투파’로 내려가는 넓은 돌길은 고색창연한 역사의 이끼가 살아있는 아름다운 길이었는데, 양편으로는 주황빛깔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큰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한가로이 앉아서 천년의 세월을 노래하고 있었다. 때맞추어 눈 아래 넓은 싼치평야에 긴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노을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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