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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부(弩里夫,524~588) 는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의 황후인 사도 황후의 오빠며 579년 세종 전군과 함께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세종 전군을 왕으로 만들려했으나 사도황후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사망 연도는 불확실하다.

옥진 궁주가 7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온 꿈을 꾸고 영실과 관계를 가졌으니 이때 생긴 아이가 바로 묘도 부인이다. 옥진은 영실과의 사이에서 묘도(妙道), 사도(思道), 흥도(興道)의 세 딸과 아들 노리부 를 두었다.

노리부는 신라 진평왕 때의 정치가•재상이였다. 579년 8월 이찬(伊湌)으로 상대등이 되었다. 579년(진평왕 1)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 이듬해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였다. 진지왕대에 대등으로 있던 노리부와 노동 중 노리부가 새로 상대등이 되었다.

사도 왕후는 진지왕으로 즉위시켜 미실을 왕후로 삼아 대원신통을 이으려 하였는데, 진지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지자 노리부를 통하여 진지를 폐위시켰다. 미실은 사도 태후와 짜고 그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했다. 미실은 사도 왕후의 오빠 노리부와 남편 세종에게 거사를 맡겼는데 이 일에는 가야계 출신 화랑 문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거칠부 사후 진지왕의 반대편으로 권력 을 잡았던 노리부가 진지왕을 화백회의을 통해 밀어내고 어린 진평왕을 왕위에 앉힌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진평왕은 할머니 사도 태후와 할머니의 오빠 노리부 등의 도움을 받으며 행정조직을 개편해 나갔다.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여 일체의 국정을 맡긴다.

진평왕 때 위화부(位和部)•선부서(船府署)•대감(大監)•제감(弟監)•조부령(調部令)• 승부령(乘部令)•예부령(禮部令) 등의 관부를 설치하여 정치제도를 완비하는 데 기여하였다.

놀부를 弩里夫 (노리부), 奴宗 (노종), 奴夫 (노부), 內禮夫 (내례부), 世宗 (세종) 등으로 표기했다.

노부(奴夫)[]

노부는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 관등은 파진찬(波珍飡)이었다. 551년(진흥왕 12)에 거칠부(居柒夫) 및 대각찬(大角飡) 구진(仇珍), 각찬(角飡) 비대(比臺), 잡찬(迊飡) 탐지(耽知)와 비서(非西),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과 비차부(比次夫), 아찬(阿飡) 미진부(未珍夫) 등과 더불어서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략하여 죽령(竹嶺)이북, 고현(高峴:지금의 철령지방)이내의 10개군(郡)을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의 승려인 혜량(惠亮)이 거칠부의 주선으로 신라에 귀화하여 국통(國統)이 되었다. 《삼국사기》 진흥왕조에 나오는 노리부(弩里夫) 및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보이는 내례부지(內禮夫智) 와 같은 인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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